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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피, 땀, 눈물의 역사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에 찾아온 영화들
영웅의 이야기에 관객은 언제나 기꺼이 매혹당한다.
세파 속에서 일상을 근근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웅은 숭배의 대상이자 대리체험을 안기는 카타르시스적 존재다.
신화, 우화, 민담 등 영웅 서사의 다채로운 스토리텔링 중에서도 유독 강렬한 경우가 있는데, 그건 바로 주인공이 허구적 존재가 아니라 실존 인물일 때다. 역사와 대결하고 비로소 스스로 역사를 일군 존재들. 우리는 그들을 위인, 열사, 운동가, 애국자와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한다.
3.1 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문화계 전반에서 역사적 의의가 큰 인물들을 재현하고 민족의식을 고취 시키는 작품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연초부터 역사극이 연달아 개봉 중인 영화계의 흐름이 단연 눈에 띈다.
이에 <말모이>, <항거: 유관순 이야기>, <자전차왕 엄복동>이라는 세 편의 영화들을 정리해봤다.

김소미 씨네21 기자 사진 씨네21 제공

감독 : 김유성
주연 : 정지훈, 강소라, 이범수
개봉 : 2019년 2월 27일
장르 : 드라마
등급 : 12세 관람가

<자전차왕 엄복동>,
스포츠 영웅의 육체를 빌려 투쟁을 말하다

<자전차왕 엄복동>(감독 김유성)은 1910년 한일병탄 직후를 배경으로 ‘전조선자전차대회’에 참가해 압승을 거둔 엄복동의 실화를 다룬다. 무력 투쟁에 한창인 독립운동가들은 어수선한 경기 도중을 틈타 주요 인사들을 암살할 계획에 몰두하지만, 자전차 가게인 일미상회를 운영하는 황재호(이범수)는 사안을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뛰어난 자전차 선수를 육성해 일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 되려 민족의 사기를 제대로 고취할 수 있으리라는 정면 승부수를 꿈꾸는 것이다. 이에 화답하듯 때맞춰 평택 시골에서 물장수를 하던 엄복동(정지훈)이 상경해 일미상회의 문을 두드린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곧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너무도 유명한 명제. 엄복동은 이를 자신의 자전차 레이스를 통해 증명한다. 스포츠란 상대를 제치기 전에 스스로의 한계를 부수는 일아니던가. 단순한 내러티브와 캐릭터, 그리고 아쉬운 만듦새를 지적하지 않기가 무척 어려운 영화지만, 엄복동의 육체가 인고 끝에 도달하는 승리의 서사를 마냥 외면하기는 어려운 이유다. 태양볕이 내리쬐는 한 여름의 경기장에서 <자전차왕 엄복동>은 눅진한 땀으로 온몸이 범벅된 스포츠 영웅의 모습을 빌려 투쟁하는 인간의 초상을 역설한다.


감독 : 조민호
주연 : 고아성, 김새벽
개봉 : 2019년 2월 27일
장르 : 드라마
등급 : 12세 관람가

<항거: 유관순 이야기>,
당신이 흘린 피

<항거: 유관순 이야기>(감독 조민호, 이하 <항거>)는 아마도 한국인에게 가장 친근한 위인 중 한 사람일 유관순의 삶을 조명한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된 유관순 열사(고아성)는 재판을 거쳐 서대문 감옥에 수감 된다. 얼굴은 짚으로 엮은 덮개로 가려져 있고 상처 가득한 손발에는 수갑이 채워진 채 서대문 감옥에 도착한 모습이 <항거>가 제시하는 유관순의 첫 스케치다.
머그샷(수감자들의 식별용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고문으로 퉁퉁 부은 유관순의 얼굴이 처음으로 드러나는데, 굳은 피가 엉겨 붙은 그 참혹한 얼굴 위로도 열사의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다. <씨네21>의 1994호에 공개되었던 <항거>의 배우 4인(고아성, 김새벽, 김예은, 정하담) 대담에서 배우들이 입을 모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고아성 배우가 연기한 유관순의 첫 등장 신”을 꼽은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화는 이후 좁고 좁은 서대문 감옥의 8호실 안에서도 끝내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유관순의 1년여를 담는다.
3평 남짓한 공간에 30여 명의 수인이 들어 찬 8호실. 그들은 원을 그리며 천천히 걷거나 교대로 휴식을 청하면서 고통 을 이기고, 밤에는 순번을 정해 쪽잠을 잔다. 이미지로 마주 하든 글로 풀어쓰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인 현실인데, 배우 고아성이 재현한 유관순은 그 와중에도 특유의 영롱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녀는 교도관이 수인들을 “개구리”라고 비하하자, 이에 지지 않고 “개굴개굴”이라고 장난스레 응수한다. 이 작은 저항은 곧이어 8호실의 수인 모두가 “우리는 개구리가 아니다!”
라고 입을 모아 외치는 시위의 촉발제가 된다. 이 때문에 독방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하고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유관순은 이후에도 3·1운동 1주년에 맞춰 감옥 내에서 대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운동을 주도하는 결기를 보여 준다. 고문이 길고 끔찍해질수록, 유관순의 옷을 적시는 진한 핏물과 그의 깨끗한 기백은 대비를 이룬다. 생명이 점점 소진되어 갈수록, 광복을 꿈꾸는 그의 의지는 짙어진다. 이것이 <항거>가 말하는 비범한 희생이다. 열일곱 소녀가 흘린 그 많은 피와 고통을 목도한 이상, 누군가는 앞으로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라는 노래를 목이 메어 차마 되뇌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독 : 엄유나
주연 : 유해진, 윤계상
개봉 : 2019년 1월 9일
장르 : 드라마 등급 : 12세 관람가

<말모이>,
우리 말은 곧 정신이라는 말

“도시락이든 벤또든 배만 부르면 되지 무슨 상관이냐.” 1941 년 경성, 소매치기를 일삼는 시정잡배인 김판수(유해진)는 생활 속에 만연한 일본어 사용에 대해 일말의 문제의식이 없다.
<말모이>(감독 엄유나)는 소시민 김판수의 각성을 중심에 두고, 일제강점 말기의 생활상과 조선어학회 사건을 비춘다. 조선어 교육과 사용을 금지하며 민족정신의 기틀이라 할 수 있는 한글을 말살하려 했던 시기다. 나라를 빼앗긴지 어느덧 30 년, 동트기 직전에 하늘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해방을 몇 년앞둔 이 시기엔 체념과 절망의 정서도 팽배했다. 조선어학회의 대표인 류정환(윤계상)의 아버지(송영창)가 한때는 열렬한 독립운동가였으나 스스로 광복이 불가능하리라 단정 짓고 일제의 앞잡이가 된 사례처럼 말이다. 류정환은 주시경 선생의 사망 이후에 중단 위기에 처한, 우리말 사전(辭典) 작업을 위해 얼마 남지 않은 동료들과 활동을 이어나간다. 한편 아들의 밀린 학비를 내기 위해 류정환의 가방을 훔치려다 붙잡힌 판수는 이를 계기로 조선어학회의 심부름꾼으로 합류한다.

<말모이>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도 조선어학회의 활약을 밝고 대중적인 정서로 극화한다. 특히 김판수가 대변하는 평범한 민중의 참여가 드라마의 온도를 높인다. “한 사람의 열 발 자국보다 열 사람의 한 발자국이 더 위대하다”는 극 중 대사는 곧 여러 사람의 눈물로 환원된다. 뒤늦게 한글을 배운 김판수가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1924)을 읽고 오열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민족의식을 자각한 그는 전에 비해 뼈아프게 눈물 흘릴 일이 잦아진다. 동료의 죽음 앞에서 눈물로 분노하고, 자신의 활동 때문에 아들이 위험에 처할까봐 류정환에게 눈물로 사죄하고 떠난다.

세 편의 영화는 한 데 묶어서는 말하기 어려운 저마다의 빼어남 혹은 아쉬움이 있지만, 영웅들의 피, 땀, 그리고 눈물을 소환해 아픈 역사의 상흔을 어루만진다는 사실만큼은 뜻을 한데 모으고 있다. 역사의식을 드러내는 영화들이 작품성의 관점에서는 얼마간 단선적이고 노골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단순함이 때로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이 화법이 오늘날의 관객에게 전하는 건 결국 고마움과 미안함의 정서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고 투쟁한 이들을 향한 도리 혹은 양심. 그 마음이 오늘과 내일을 살게 하고, 때로는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긋이 독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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