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톤의 석탄을 싣고 바다를 건너는 일.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숫자로 보일 수 있지만, 김승주 선장에게는 우리 일상을 밝히는 전기를 책임지는 여정이다. 11년간 항해사로 바다를 누비며 선장의 자리까지 오른 그는 변화무쌍한 바다에서 안전과 책임의 가치를 배웠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과 배를 이끄는 리더가 됐다.
글 차예지(편집실) 사진 김승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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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차 항해사로, 선장의 자리까지 오르셨습니다. 그간의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돌이켜보면 참 빠르게 지나간 11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배를 탔을 때만 해도 제가 선장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저 하나씩 목표를 이루다 보니 3등항해사에서 2등항해사, 1등항해사를 거쳐 지금의 선장 자리까지 오게 됐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어요. 바다에서는 날씨와 파도처럼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많았고,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았어요. 특히 선장이 된 이후에는 제 판단 하나가 배와 선원들의 안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무게를 더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잘 버텨왔다’는 생각과 함께,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경험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소 어떤 선박을 운항하는지, 최근에는 어떤 경로로 운항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벌크선을 운항하고 있습니다. 제가 탄 배는 석탄처럼 포장되지 않은 대량의 원자재를 한 번에 운송하는 선박입니다. 최근에는 호주, 인도네시아에서 수만 톤에 이르는 석탄을 선적해 삼천포, 혹은 영흥에 위치한 발전소로 석탄을 운반하고 있습니다.
흔한 직업이 아니기도 하고, 업계에 여성이 적다 보니 늘 자부심을 가지고 근무하실 것 같습니다.
사실 배에 있을 때는 제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크게 의식하면서 근무하지 않아요. 선장으로서 화물을 안전하게 싣고, 정해진 목적지까지 무사히 운항해서 한 항차를 잘 마무리하고 나면 ‘이번 항차도 무사히 마쳤구나, 맡은 임무를 잘 완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선장으로서 가장 큰 자부심을 느껴요.
여성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은 휴가 중이나 외부 활동을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여성 선장을 신기하고 대단하게 바라봐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럴 때면 제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도 하고, 그런 시선을 보내주시는 것 자체가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배에서의 하루는 어떻게 지나가는지 궁금합니다.
항해 당직 상황과 기상, 해상 상태, 선박의 위치와 항로, 목적지까지의 ETA(도착 예정 시간) 등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선원들의 작업 상황과 안전관리, 화물 상태를 점검합니다.
배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일과 생활의 경계가 모호한 것 같아요. 문제가 생기면 바로 판단하고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늘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가지고 생활해야 하거든요.
일과가 끝나면 운동을 하기도 하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도 해요. 선원들과 탁구를 치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중요한 일상의 일부입니다. 결국 배에서의 하루는 일하는 시간과 생활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는 것 같아요.
바다, 그리고 항해사라는 직업을 사랑하시는 게 느껴집니다. 일의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가장 큰 원동력은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의 일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에요. 항해사는 눈앞에서 바로 결과를 확인하는 직업은 아니에요. 수만 톤의 화물을 싣고 며칠, 때로는 몇 주 동안 바다를 건너 목적지까지 운송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운송한 원자재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에너지와 산업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가 하는 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운반하는 화물이 누군가에게 전해줄 행복과 삶의 기쁨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만큼 큰 행복은 없는 것 같아요.
본인에게 바다란 어떤 의미인가요?
저에게 바다는 저를 가장 저답게 성장시켜 준 거대한 스승이자 무대라고 생각해요. 육지에서는 내가 계획한 대로 하루가 흘러가는 경우가 많지만, 바다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해도 갑자기 날씨가 변할 수 있고,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요. 그래서 바다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게 됩니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를 최대한 하고, 상황이 달라졌을 때 다시 판단하고 대응하는 법을 배우게 돼요.
하나의 답만 정해놓고 나아가기보다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방향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힘도 얻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바다는 저에게 단순히 일하는 공간을 넘어, 삶을 배우고 저 자신을 성장시켜 온 가장 큰 스승입니다.
바다는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기에, 바다에서 일하면서 가치관이 변하기도 할 것 같아요.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반드시 실패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항해에서는 출항 전에 아주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지만, 실제 항해를 시작하면 날씨나 해상 상황에 따라 계속 계획을 수정해야만 해요. 중요한 것은 처음 계획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한 상황에 맞게 가장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것이더라고요.
삶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 조금 달라졌다고 해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방향을 바꾸고, 속도를 늦추고, 잠시 돌아가는 것이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는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하려 하기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를 충실히 하고 변화가 생겼을 때 유연하게 대응하려는 자세를 가지게 되었어요.
한정된 공간 안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몇 개월을 보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텐데 어떤가요? 선장으로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배에서는 같은 사람들과 몇 달씩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관계가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선장으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누가 맞는지를 가리는 것보다 함께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는 먼저 서로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개인적인 감정과 업무상의 문제를 구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선박의 안전과 업무의 원칙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선장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구성원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선원들과 일대일로 면담하면서, 업무 중 힘든 일이나 고충을 듣는 시간을 따로 마련해요. 좋은 팀워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바다에서 일하시면서 에너지의 소중함을 느낀 적이 있다면요?
선박에는 발전기가 있어 필요한 전력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데, 한 번은 발전기에 이상이 생겨 전력 공급이 끊기는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어요. 불이 모두 꺼지고 배 안이 어둠에 잠기는 순간, 전기가 없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둠을 직접 경험하고 나니 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되었어요. 선박에서는 전력이 단순히 생활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항해와 통신, 각종 안전설비를 유지하는 데도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해요.
육지에서는 스위치를 켜면 당연히 불이 들어오지만, 바다에서는 그 당연함을 유지하기 위해 발전기를 비롯한 수많은 설비와 사람들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선박에 실린 석탄이 발전소에 공급되어 전기를 생산합니다. 배를 운항하는 사람으로서 에너지 생산 과정에 기여하고 있는 만큼, 어떤 책임감을 느끼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운송하는 석탄이 발전소에 도착해 전력을 생산하는 과정의 일부가 된다는 점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선박에 실린 화물이 단순한 숫자로만 보이지 않게 된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수만 톤의 석탄을 싣고 항해할 때면, 이것이 결국 누군가의 가정과 산업 현장에서 사용되는 전기로 이어진다는 생각에 화물을 안전하게 운송하는 것이 막중한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항부터 항해, 입항, 하역까지 모든 과정에서 선박과 화물, 그리고 선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달과 환경 변화 등으로 모든 산업군이 영향을 받고 있죠. 해운업에서도 체감하는 변화가 있을까요?
과거에는 해운업의 변화라고 하면 선박의 크기나 항해 장비, 운항 효율 같은 부분을 먼저 생각했다면, 이제는 에너지 안보와 공급망의 안정성, 탄소 배출, 디지털 기술 등 훨씬 다양한 요소가 함께 변화하고 있어요.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LNG를 비롯해 메탄올, 암모니아 등 친환경 연료를 사용하는 선박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에요. 새로운 연료를 사용하는 선박들이 등장하면서 선박을 운항하는 항해사에게도 새로운 연료의 특성과 안전관리 방법을 이해하는 전문성이 요구되고 있어요.
선박에 적용되는 기술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육상과 소통하고 필요한 정보를 얻는 데 제한이 있었지만, 이제는 스타링크와 같은 통신 기술이 발전하면서 바다에서도 육상과 실시간에 가까운 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기상 정보 역시 훨씬 빠르고 정밀하게 확인할 수 있고, AI와 다양한 데이터 기반 기술을 활용해 기상과 해상 상황을 분석하고 항로를 보다 효율적으로 계획하는 것도 가능해지고 있어요.
에너지 산업에서 탄소중립과 친환경 전환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해운업과 항해사의 역할은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전망하시나요?
해운업 역시 탄소중립과 친환경 전환이라는 큰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기존의 화석연료를 운송하는 것뿐만 아니라 LNG, 메탄올, 암모니아, 수소 등 다양한 친환경 에너지원과 이를 운송하는 선박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친환경 규제와 새로운 기술을 지속적으로 배우고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해질 것으로 사료됩니다.
앞으로의 항해사는 전통적인 항해 능력만큼이나 기술을 이해하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능력이 중요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AI와 데이터 기술을 활용해 기상과 선박의 상태를 분석하고 보다 효율적이고 안전한 항로를 찾는 등,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스마트 해기사’로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항해사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바다에서는 아무리 좋은 장비와 데이터를 가지고 있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고, 결국 그 순간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첨단 기술과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기본적인 항해 능력과 안전에 대한 원칙만큼은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친환경·디지털 시대에 해기사(海技士)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됩니다.
항해사로서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개인적으로는 지금보다 더 좋은 선장이 되고 싶어요. 선장의 역할은 단순히 배를 목적지까지 운항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선원들이 안전하게 일하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후배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역시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 선배들에게 배웠기 때문에 그 경험을 후배들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어요. 제가 걸어온 길이 누군가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어 망설이고 있는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앞으로 해운업과 에너지 산업이 어떻게 변하든 그 변화에 뒤처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계속 배우면서도, 바다에서 가장 중요한 안전과 책임이라는 기본은 잃지 않는 선장. 돌이켜봤을 때 좋은 배를 운항했다는 기억뿐만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항해했다는 기억을 남기는 선장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