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 > 명사 태평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오늘이 달라질까. 불가능한 일임을 뻔히 알면서도 해묵은 질문을 자꾸 던지는 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마음, 역사를 탐구하는 박은봉 작가는 그 해답을 알고 있을까.
역사학자, 어린이 작가, 교육자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본인을 가장 잘 소개하는 건 어떤 걸까요?
역사학자, 교육자는 인터넷상 프로필이고, 제가 올린 게 아니라서요. 저는 보통 작가라고 제 소개를 합니다. 어른 책으로 시작해, 어린이를 위한 책을 쓰기도 했죠. 언젠가 또 어린이 책을 쓸 수도 있어요. 모든 세대를 위한 글을 쓰는 작가라고 할까요.
‘역사’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신 이유나 계기가 있으실까요.
제가 한글을 좀 일찍 깨쳤어요. 요즘에 비하면 빠른 건 아니지만 제가 어릴 적만 해도 대여섯 살에 한글을 깨치면 매우 빠른 거였어요. 엄마에게 배웠는데, 그렇게 한글을 알고 나서 책을 읽기 시작했죠. 집에 있는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가 엄마가 책을 사주셨어요. 당시에는 다 전집이었지요.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소녀 세계 문학 같은 전집류요. 그런 전집들에 이어 역사책을 사주신 거예요. 아마도 《이야기 한국사》라는 10권짜리 시리즈였던 것 같아요. 그걸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어릴 적부터 역사의 재미에 눈뜨신 거네요.
지금 돌이켜보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이런 데서 인물을 뽑아 재미있게 각색한 책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 어느 소설, 동화보다 재미있어서 마르고 닳도록 읽었지요. 저에게는 역사가 그냥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어려서부터 흥미가 많아 거부 반응이 별로 없었어요. 결국 역사와 친해진 건 어린 시절 독서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무슨 일이든 처음 어떻게 접하느냐가 그만큼 중요한 것 같아요.
저서 《한국사 편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이 멋진 책을 어떻게 집필하시게 되셨나요.
사실 《한국사 편지》보다《엄마의 역사 편지》가 먼저예요. 《엄마의 역사 편지》는 세계사인데, 편지 형식으로 아이에게 세계사를 들려주는 책이죠. 제가 처음 쓴 어린이 책이었어요. 《한국사 편지》는 엄마의 역사 편지에 자매 편처럼 기획된 거예요. 어린이를 위한 책을 쓴 경험이 적어 망설였지만, 《엄마의 역사 편지》가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다시 도전하게 되었죠. 《엄마의 역사 편지》는 편지글 형식의 역사 책 네루의《세계사 편력》이란 책을 벤치마킹 했다고 할 수 있어요. 네루가 옥중에서 10살 딸, 인디라 간디를 위해 편지 형식으로 세계사를 들려주는 내용이지요. 제가 그 책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었거든요. 지금도 스테디셀러로 읽히고 있는,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명작이지요.
《한국사 편지》를 실제 따님에게 이야기해 주시듯 쓰셨다고 들었어요.
《한국사 편지》를 쓸 때가 마침 제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여서 그런 책이 필요한 나이였어요. 제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역사책을 읽히고 싶어 딸을 데리고 광화문 교보문고를 갔는데 마음에 드는 역사책을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재미가 있으면 내용이 충실하지 못하고 내용이 괜찮다 싶으면 너무 재미가 없고, 두 가지를 다 갖춘 어린이 역사책이 왜 없을까 싶었죠. 그럴 때 마침 출판사로부터 제의를 받아 책을 쓰게 되었죠. 실제로 딸에게 가장 먼저 초고를 읽어보게 하고 대화하고 의견에 따라 고쳐가며 원고를 완성했어요.
역사에서 확장해 심리학까지 공부하셔서 관련 서적도 펴내셨죠.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50대에 많이 아팠어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몸과 마음이 망가진 상태였어요. 책 한 줄 읽을 수 없고 글도 한 줄 쓸 수 없을 만큼 심각했어요. 운동도 하고 병원 치료도 받고 심리 상담도 하고 좋다는 건 다 했어요. 그렇게 3년쯤 지나니 조금씩 회복이 되면서 도대체 마음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이 힘들 수 있는지 궁금해졌어요. 다시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마음이 움직이는 작동 원리를 알아야겠다 싶었어요. 내가 통제당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통제해야겠다 싶어서 마음 공부를 하려고 심리학 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심리학을 통해 마음을 통제하실 수 있게 되셨나요?
서양 심리학에서 기본적인 치유의 메커니즘은 자아를 강화하는 거예요. 자아가 약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보는데, 그걸로는 저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았어요. 다른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고 찾던 중 마음에 대한 탐구는 동양이 서양보다 훨씬 오래고 깊은 전통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불교 심리학을 공부하게 되었어요.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논문을 쓰면서 마음에 품었던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알게 되었어요.
역사와 심리학은 관계가 없을 것도 같지만 한편으로 연관이 깊을 것도 같은데요.
공통점이 있어요. 다 ‘사람 이야기’고 ‘사람의 문제’라는 점이지요. 역사는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에요. 쉽게 단순화하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 혹은 인간 집단이 쭉 쌓아온 어떤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이야기가 역사라 할 수 있죠. 저와 다르게 정의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 생각은 그래요. 결국 역사는 사람 이야기인데 어떻게 마음이 빠질 수 있나요? 그래서 외국에는 역사 심리학이라는 학문 분야도 있지요.
이번 호 <코스포 패밀리>의 주제는 ‘과거의 나와 대화할 수 있다면?’인데요, 지나간 일기를 보는 건 과거의 나와 대화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기를 꾸준히 쓰시나요?
지금은 간단한 메모나 다이어리를 쓸 뿐 일기는 쓰지 않아요. 행복해져서 일기를 쓸 필요가 없어요. 이야기할 곳이 없어 혼자 끙끙거리고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그럴 때 뭔가 이렇게 밖으로 내보내고 풀어내는 이런 소통의 어떤 창구, 출구로서 일기를 썼던 것 같아요. 《치유 일기》는 힘들었을 때 일기를 바탕으로 쓴 책이죠. 일기를 꼭 써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일기는 쓰고 싶을 때 마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을 때 어딘가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은 그런 순간에 쓰는 일기가 진짜 일기죠.
일기를 꼭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니 마음이 편해지는데요, 그럼 과거의 나를 어떻게 만나고 바라봐야 할까요.
사람들은 과거에 대해, 역사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과거를 바로잡으면 현재가 바뀌지 않을까 하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오늘 내가 행복하면 과거도 행복하게 느껴져요. 누구나 과거에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게 마련이죠. 어떤 시간은 없었으면 싶고 낭비같이 느껴지기도 하죠. 그런데 지금 나의 삶이 충만하고 만족스러우면 과거 쓸모없던 것 같던 시간도 재평가돼요. 그때 내가 힘든 일을 겪어 지금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요. 오늘 나의 상태에 따라 과거가 달리 해석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오늘 잘 살기 위해선 과거를 들여다보기보다 오늘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흔히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고 하잖아요. 오늘을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답니다.
누구나 행복하길 바라지만, 쉽지 않은 것 같은데요.
사람들은 흔히 ‘행복’이란 항상 ‘하하 호호’하는 거라고 착각해요. 저도 행복해서 요즘 일기를 안 쓴다고 했지만, 그 ‘행복’ 안에는, 우울할 때, 분통이 터질 때, 슬프고, 울고 웃고 하는 모든 날이 포함된 거예요. 불행과 두려움, 나쁜 일은 오래 기억에 남아요. 이건 생존 본능이자 진화의 법칙이에요. 그런 일들을 오래 기억해야 그 상황을 피해 생존을 유지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행불행의 비율이 거의 비슷하다고 했을 행복은 내버려 두고 불행을 유독 오래, 크게 기억하게 마련이죠.
그런 진화의 법칙이 있었군요. 끝으로 <코스포 패밀리> 독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과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조언해 주시겠어요.
과거를 들여다본다고 하지만 사실 거기엔 오늘만 있어요.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오늘을 살았죠. 당시의 오늘, 그것이 쌓여 지금 여기가 된 거예요. 우리는 모두 오늘을 살잖아요. 그게 바로 미래를 만드는 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