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페셔널

나눔, 누군가에게는
반짝이는 희망으로 전해진다

남제주빛드림본부
진성협 과장

Write. 한율
Photograph. 이승헌

올 2월 입사 만 40주년을 지난 진성협 과장은 평생 ‘열정’과 ‘치열’이라는 덕목을 품고 살아왔다. 때문에 후회도, 미련도, 아쉬움도 없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매 순간 가열 찼고, 매 순간 뜨거웠다. 회사 생활뿐 아니라 이웃을 위한 나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708번의 헌혈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해온 그는 어렵고 힘든 이웃에게 늘 가까이 있었다. 사람을 향해 있는 그의 마음과 미소는 세상을 따스하게 비추는 봄볕을 닮았다.

내 인생, 헌혈과 함께하다

진성협 과장에게는 한 달에 두 번씩 하는 ‘루틴’이 있다. 바로 헌혈이다. 그는 지금까지 총 708번의 헌혈을 했다. 그가 한 헌혈 횟수를 듣고는 그 누구라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진성협 과장은 헌혈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천이며, 고귀한 희생의 산물”이라고 표현했다. 문득 그가 헌혈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초등 동창이 헌혈을 하고서 백혈병의 일종인 재생불량성 악성빈혈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남을 위해 헌혈을 하던 친구가 누군가의 혈액이 정말 필요한 상황에 처하게 된 거죠. 하지만 당시에는 헌혈 인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혈액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위해 동창들이 힘을 모아 헌혈증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창은 안타깝게도 2년 후 유명을 달리했어요. 제가 헌혈을 시작한 계기입니다.”

어릴 때부터 주삿바늘이 무서워 예방접종도 피해 다녔다는 그는 이후 헌혈 전도사가 되었다. 1981년 첫 헌혈을 시작한 이래 진성협 과장은 전혈 64회, 성분헌혈 644회라는 제주도 최다 헌혈 기록을 갖게 됐다.

뿐만 아니라 그는 헌혈을 하고 받은 증서 687매를 백혈병 환자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증까지 했다. 그가 현재 갖고 있는 헌혈증서는 스물한 장이다. 스물한 장의 증서에는 그만의 특별한 사연이 있다.

“장인어른이 수술을 해야 하는 일이 발생했어요. 혈액이 필요했는데, 증서를 이미 다 나눠줬기 때문에 그 당시 저에게는 한 장도 없었습니다. ‘아차!’ 싶더군요. ‘내 주위에서도 얼마든지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데,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후로는 증서 스무 장 정도는 비상용으로 갖고 있게 되었습니다.”

진성협 과장은 헌혈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도 노력해왔다. 학교, 직장, 군부대 등 단체헌혈이나 가두헌혈에 참가해 헌혈 홍보와 캠페인을 실시했고, 지역 언론에 출연하여 건전한 헌혈 풍토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며 ‘헌혈이 곧 사랑을 나누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애써왔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이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으니까, 헌혈을 해서 남에게 보탬이 된다면 내가 행복을 느끼니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간혹 헌혈증서를 받은 분의 가족이 ‘고맙다’며 연락을 해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면 코끝이 저도 모르게 찡해집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발걸음을 내딛다

사실 나눔에 관한 한 헌혈은 그에게 있어 일부일 뿐이다. 진성협 과장은 지역사회를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인해 남을 돕고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점점 퇴색해져가는 세상에 안타까움을 느낀다”는 그는 자신만이라도 더불어 살아가는 가치를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그는 1993년 12월 나눔적십자 봉사회를 결성해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활발히 펼치기 시작했다. 1994년부터 제주시 관내 독거노인 세 명을 매월 1회씩 방문하여 밑반찬을 전달하고 그들의 따뜻한 말동무가 되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지속적으로 힘써왔다. 또한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장애인들의 소중한 손과 발이 되어주고 있다.

“2006년 한국남부발전 해외자원봉사단 자격으로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 외곽에 자리한 던눈초등학교로 학교 수리를 갔던 일, 2013년 베트남 하노이 인근의 몽중중학교를 방문해 학교 시설을 보수하고 생활용품을 지원했던 일들도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그때 보았던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제주가 고향인 그는 제주를 깨끗하게 지키기 위한 활동에도 열심이다. 2010년부터 매년 6월마다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성산일출봉 인근의 신양리 바닷가에 밀려와 쌓이는 파래 제거 작업을 실시하고, 제주특별자치도가 선정한 ‘자연보호 자원봉사자’로 분기마다 자연보호 활동을 벌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4년부터 2009년까지는 제주도민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제주시 서부두 방파제의 해양쓰레기를 제거하면서 청정한 제주 자연 가꾸기 운동을 확산했다. 이는 제주도민들이 바다 환경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내가 만족하며 사는 삶, 이웃과 더불어 평생 살고 싶어

진성협 과장은 1982년에 입사해 올 2월 입사 만 40주년을 넘겼다. 나눔을 위해 평생 노력해온 것처럼, 그는 회사에서도 자신이 인정하는 자신만의 성과를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기 위해 노력해온 40년의 세월은 늘 치열하고, 늘 뜨거웠다.

“도내 발전소 건설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제주화력발전본부와 남제주빛드림본부를 제 손으로 직접 건설했어요. 표지석에 건설 유공자로 이름을 남겼다는 것은 가장 큰 보람입니다. 40년을 근무하면서 저에게 주어진 일은 정말 최선을 다해 똑 부러지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지역활동을 열심히 하려면 회사 일은 그 몇 배로 신경을 쓰며 잘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떳떳하게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봉사활동을 다닐 때면 어린 자녀들을 꼭 데리고 다녔다는 진성협 과장. 그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일화 하나가 있다. 그는 일화를 전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 큰애가 6학년 때의 일입니다. 아이가 일기장에 ‘우리 아빠가 200회째 헌혈을 했다’고 썼어요. 담임 선생님이 일기장을 보고서 거짓말을 썼다고 아이를 혼냈습니다. 아이가 울면서 집에 왔는데, 마음이 정말 참담하더라고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학교에 쫓아가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선생님은 안 믿어줘도 된다, 너만 아빠를 믿어주면 된다’고 그랬어요. 아이와 관련된 일이라 그런지 그날이 오래도록 기억에서 잊히지 않습니다.”

진성협 과장은 2020년 1월부터 매주 주말과 공휴일을 이용해 헌혈 도우미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헌혈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에스코트 업무를 맡은 그의 얼굴에는 늘 환한 웃음꽃이 가득하다.

“개인적으로 소망이 있다면 헌혈 1,000회를 하고 싶은데 현행법상으로는 힘듭니다. 혈액관리법에 의하면 헌혈에도 정년이 있어서 만 69세까지만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건강하게 살면서 지속적으로 헌혈을 한다고 해도 998회로 끝나게 되더군요.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지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에 혈액관리법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법이 개정돼 제 목표인 헌혈 1,000회 달성을 꼭 이루고 싶습니다.”

아프고 힘든 이웃이 있으면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서 도움을 주고, 취약계층을 위해 기꺼이 월급을 쪼개 나누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진성협 과장에게 나눔은 삶이자 일상이다. 그는 남은 생도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며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과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따스한 봄볕이 부드럽게 그의 얼굴에 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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