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 > 명사 태평
나무는 우리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맑은 공기를 선물한다. 나무는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나무를 깊게 관찰하지 않는다.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는 사진으로 나무를 담고 글로 나무의 이야기를 묶어 그런 우리에게 보낸다.
나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기쁨이, 휴식이 되길 바라면서.
나무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을 생소하게 느끼시는 분들도 있을 듯합니다. 어떻게 지금 자리에 오게 되셨나요?
12년 기자 생활은 즐겁고 보람된 일이었습니다만, 퇴직 무렵이 마흔 살 되었을 때입니다. 신문 기사를 많이 썼지만, 그게 온전히 ‘나의 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의 글’을 써보자는 생각을 했고요. 그때만 해도 무슨 주제나 소재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슨 글을 쓸지, 무슨 일을 할지 궁리한다는 생각으로 조용히 머무를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마침 천리포수목원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일반인에게 개방하던 곳이 아니었는데, 가까운 분이 추천해 주셔서 두 달 동안 조용히 홀로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나무를 바라보게 되었고, 나무에 담긴 신비롭고 흥미로운 속내를 캐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수목원에서 보낼 때 썼던 글인데요. 옮겨드립니다.
“날마다 새로운 기사를 만들어내야 하는 결코 새롭지 않은 일상에 깊숙이 뿌리내린 일탈의 갈망으로 서울에서 떨어진 이곳 천리포수목원으로 홀로 숨어들었습니다. 철저하게 무위도식하려는 마음으로 소지품도 얼마 챙기지 않은 채 숨어든 천리포수목원에서 나는 한 달 반을 보냈어요.
펄펄 날리는 싸락눈을 맞으며 수목원 숲길을 산책하던 중에 내 눈앞에 하얀 꽃으로 떡 하니 우뚝 선 나무 한 그루. 목련이었습니다. 눈이 펄펄 날리는 겨울 수목원 숲길에서 만난 그 꽃은 틀림없는 목련,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바로 이 ‘리틀 젬’입니다. 한겨울의 목련 앞에서 나는 시간이 한순간 멈춰버렸든가 아니면 나무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뒤범벅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나무 위 한 송이의 꽃 앞에서 내가 속해있는 세상의 모든 시간, 그리고 늘 마감 시간에 쫓기듯 몸이나 마음이 모두 숨차게 달리기만 했던 시간들이 완전히 멈춰버린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식물학에 깊이 들어갈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냥 나무가 좋아 나무를 보러 다니는 일에 불과했지요. 그리고 나무를 바라본 느낌을 온전히 글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식물도감보다 나무를 소재로 한 시들을 더 많이 찾아보게 되었지요. 그게 나중에 《나무가 말하였네》라는 책 3권으로 정리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나무에 담긴 사람살이의 무늬, 오래된 나무를 찾아보고, 이 나무를 누가 왜 이 자리에 심고 키웠을까 하는 의문을 하나둘 풀어보는 거였지요. 나무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니, 결국은 나무 곁에서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보고 이야기를 듣는 게 대부분의 작업이었습니다. 소재가 나무로 바뀌었다 뿐이지, 신문 기자 때의 일과 뭐 달라진 게 없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둘 찾아볼수록 그 나무에 담긴 뜻이 매우 의미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를테면 나무에 얽힌 전설이 있다고 해 보죠. 그 전설은 옛사람들이 더 지혜롭게 살기 위한 ‘오래된 삶의 철학’이에요. 하지만 세월 지나면서 그런 지혜로운 전설, 철학들이 차츰 사라집니다. 나이 많은 어른이 돌아가시면 그 옛이야기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 많은 나무, 더 많은 마을을 찾아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작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간 수많은 나무를 관찰하셨을텐데요, 가장 좋아하는 혹은 작가님께 의미가 깊은 나무가 있을까요?
특별히 한두 그루를 더 좋아할 리 있겠습니까. 그래도 특별한 나무를 이야기하라면 나무 답사 초기인 2000년 즈음에 만났던 두 그루의 나무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와 ‘의령 백곡리 감나무’입니다. 두 그루의 나무는 사실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가면서, 하마터면 마을에서 베어낼 뻔했던 나무입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본 뒤에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우리나라의 물푸레나무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물푸레나무라고 판단해 문화재청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해달라고 개인 자격으로 지정신청을 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이고요. 의령 백곡리 감나무는 감이 열리지 않아 마을에서 베어버리려고 했던 나무인데, 제가 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감나무더라고요. 앞의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와 마찬가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 작업에 역할을 했던 나무입니다. 얼마 전에는 우리가 가장 친근하게 느끼는 나무입니다만, 문화재로 지정한 나무가 별로 없는 참나무 종류 중에서 한 그루를 찾아내 또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워낙 오래 나무를 찾아다니다 보니, 이제는 그런 나무들이 좀 많아졌습니다. 다만 앞의 두 그루의 나무는 제가 나무를 잘 알지도 못하던 초기에 우리나라 최고의 나무로 판단해 나름대로 잘 지킬 수 있게 된 계기였던 나무여서 기억에 남습니다.
<코스포 패밀리(KOSPO Family)> 147호는 한국남부발전 삼척본부의 이야기로 꾸며집니다. 강원 삼척에서 볼 수 있는 나무 중 관찰하기 좋은 나무가 있을까요?
삼척에는 좋은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비공식적이지만 가장 오래된 나무로 알려진 1,500년 수령의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낮은 산 꼭대기에 우뚝 서 있는 한 그루의 은행나무는 삼척을 생각하면 제게는 가장 먼저 떠오른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가운데에 가장 오래된 나무인 ‘삼척 도계리 긴잎느티나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나무는 ‘긴잎느티나무’라고 돼 있지만 그냥 느티나무라고 봐도 되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1,000년이 넘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느티나무입니다.
한 그루 더 보태자면 ‘삼척 궁촌리 음나무’를 들어야 하겠네요. 이 나무는 고려 말 공양왕이 자객의 습격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면서 큰 음나무 곁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전설을 가진 나무입니다. 음나무는 이처럼 벽사의 의미를 가지는 나무입니다. 음나무 가운데에는 가장 크기도 하고 가장 오래된 나무이기도 합니다.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는 나무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죠. 지금처럼 여름으로 넘어가는 때에 관찰할 수 있는, 나무의 재미난 특징이 있을까요?
사실 여름은 나무 관찰에서 특징이 없는, 가장 심심한 계절입니다. 나무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건 아무래도 꽃과 단풍, 계절로 치면 봄과 가을이겠지요. 여름에는 꽃도 별로 없잖아요. 그러나 잘 살펴보면 여름에 보기 좋은 나무도 적지 않습니다. 여름에 꽃 피우는 나무들도 꽤 있습니다. 그 가운데 수국, 무궁화, 배롱나무를 이야기할 수 있지요. 이 나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여름 내내, 적어도 100일 이상 꽃이 계속 피어난다는 겁니다. 게다가 꽃송이도 크고 화려하다는 특징이 있어요. 덧붙이자면 꽃 지고 올라오는 열매의 변화 과정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처음에 연초록으로 올라와 차츰 빛깔이 변합니다. 어떤 건 까맣게, 어떤 건 붉게, 또 어떤 건 노랗게 익어갑니다. 그 과정을 보는 건 흥미롭지요.
책을 통해, 봄에 흔히 만나는 친근한 개나리는 우리 민족과 닮은 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하며 우리와 닮은 나무가 또 있을까요?
대개는 주변에서 가장 친근하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나무가 피워내는 꽃과 전체적인 생김새가 뿜어내는 분위기가 민족의 특징을 닮은 나무를 그렇게 꼽곤 하지요. 우리에게 개나리가 그런 나무였던 겁니다.
그렇게 우리와 친근한 나무를 꼽자면 두 종류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진달래가 우선입니다. 진달래는 특별히 심어 키우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산과 들에서 가장 친근하게 만날 수 있는 나무입니다. 오래 전 우리 선비들이 진달래를 예찬한 글을 많이 찾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무래도 느티나무를 꼽아야 하겠지요.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잘 자라는 나무이고 오래 사는 나무여서, 농촌마을에서는 마을의 살림살이를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혹은 정자나무로 심어 키우는 대표적인 노거수(老巨樹)입니다. 우리와 닮은 나무를 물으셨는데요. 나무를 의인화해서 우리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하기는 쉽지 않고요. 우리와 가장 친근한 나무를 이야기 해봤습니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1.6도 상승할 경우 1㎢당 생존할 수 있는 나무 종의 수가 현재보다 약 33% 감소한다고 합니다. 나무 종의 수가 줄어들면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기후 변화 혹은 기후 붕괴에 따른 나무의 변화는 정말 심각합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기후 변화의 결과가 매우 천천히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냄비 속의 개구리’와 같은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거죠. 기후가 변화하는 사실을 우리는 잘 눈치채지 못하고 지내지만, 조금만 자세히 관찰한다면 자연에서 갖가지 변화 현상의 실마리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의 시그널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나무입니다. 천년을 살아가는 나무는 기후 변화에 나름대로 대응하면서 살아가지만, 그 대응 과정이 느리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무는 사람이 일으킨 기후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마련이지요.
나무는 모든 생명의 기반입니다. 나무를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스스로 살아갈 양분을 만들지 못합니다. 다른 생명들은 결국 나무가 지어낸 양분을 취하며 살아가는 거지요. 예를 들어 A라는 종류의 나무가 사라졌다고 해 보자고요. 그러면 A 나무에 깃들어 살던 다른 생명은 보금자리를 잃습니다. A 나무가 피운 꽃의 꿀을 먹고 살아가던 곤충은 먹이를 찾을 수 없어 죽습니다. 그 곤충은 또 다른 생명의 먹이였을 겁니다. 새와 동물도 따라서 죽게 되겠지요. 만약 그 동물이 돼지였다면, 이제 지구상에는 삼겹살이 사라지겠지요. 사람은 이제 삼겹살을 먹을 수 없게 될 겁니다.
예를 든 이야기가 비약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처럼 연쇄작용을 일으키는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호모사피엔스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건 지구상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호모사피엔스가 멸종하면 지구의 생태계는 더 안락해질 수 있습니다. 호모사피엔스는 지구의 다른 생명에게 주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무는 그 정반대입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을 먹여 살리는 게 나무잖아요. 그 나무가 사라진다면 생태계는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날씨가 더워져서 한 종류의 나무가 사라지면 그 날씨에 적응하는 다른 나무가 나오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이유로 기후 변화를 ‘기회’라고 떠드는 축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건 완전 헛소리입니다. 생물학에는 ‘꽃불변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한 종류의 꽃에는 모든 매개동물(대개는 곤충)이 모여드는 게 아니라, 딱 정해진 곤충이 찾아온다는 게 ‘꽃불변성’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든 사례에 대해 보태자면 A라는 나무가 아무리 미미한 존재라 해도 나무 A에 대응하는 매개동물 B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변화한 기후에서 새로운 나무가 나온다 해도 그 나무에 대응하는 매개동물이 번성해 새로운 먹이사슬의 균형을 이룰 때까지는 매개동물 B가 사라질 수밖에 없고, 그에 연결된 모든 생명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과정이 호모사피엔스가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매우 느린 속도로 천천히 진행된다는 겁니다. 최근의 기후 변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호모사피엔스가 알아채는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게 진짜 문제입니다.
나무의 삶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직장생활의 진리가 있을까요?
저는 주로 오래된 나무, 즉 노거수를 찾아다닙니다. 제가 찾아본 나무들은 오래 살아 늙었지만, 세월의 연륜이 깊어진 만큼 더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늙어가면서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생명체는 ‘나무’밖에 없다”는 말씀을 자주 드립니다.
직장생활의 진리를 따로 이야기할 만큼 제가 직장생활을 오래 하지 않았습니다. 고작해야 12년 기자 생활한 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직장생활이라고 해서 특별히 여느 인생살이와 다를 게 없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앞에서 이야기한 나무가 늙어가면서 왜 더 아름다워지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말없이 제 자리를 지키며 마치 수도승처럼 비바람, 눈보라, 그리고 세월의 풍파를 묵묵히 이겨내는 고행을 이겨낸 까닭이겠지요. 나무처럼 아름답게 늙으려면 아마도 자기에게 닥친 고행을 말없이 겪는 게 필요하지 싶네요. 저 역시 할 수만 있다면 나무처럼 세월의 깊이를 품격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버리지 못합니다.
20여 년을 걸쳐 나무에 대해 글을 쓰고 계시고, ‘나무 편지’를 통해 나무 이야기를 전달하고 계시죠. 그렇게 좋아하는 일에 꾸준히 몰입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늘 나무 이야기를 하지만, 저의 나무 이야기는 그 안에 담긴 사람살이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건 제가 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가 아닌 탓도 있겠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닙니다. 나무는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사람살이의 모든 것을 지켜보는 생명체입니다. 그가 사람의 언어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는 필경 제 곁을 스쳐간 사람살이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가만히 나무 줄기 껍질에 드러난 나뭇결을 바라보고 또 그 곁에서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면, 나무에 담긴 사람살이의 온갖 사연이 하나 둘 새어나옵니다. 나무는 말하지 않으면서 많은 말을 하는 생명체입니다. 그가 지닌 숱하게 많은 이야기들을 듣는 건 지금 그 곁에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좋아하는 대상을 닮아간다는 말이 있죠. 혹은 이미 닮았기 때문에 좋아지거나요. 작가님께 나무는 어떤 쪽인가요?
나무를 닮았다거나 닮아간다는 생각을 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굳이 이 질문에 답을 하자면 ‘닮고 싶은’ 나무 이야기를 해야 하지 싶네요. 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대답으로는 늘 ‘감나무’를 이야기합니다. 감나무는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집마다 뒤란에 한 그루쯤은 심어둔 나무. 울도 담도 없는 시골집 뒷마당에서 하늘 향해 삐쭉이 솟아오른 나무. 너무 높이 솟거나 지나치게 넓게 퍼지지 않아,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 아주 편안한 나무입니다. 하지만 흔하고 편한 탓일까요, 감나무는 있어도 있는 줄을 잘 모르지요. 그저 감 열릴 즈음이나 되어야 맛난 감을 따려고 동네 조무래기들이 웅기중기 매달리는 게 전부입니다. 그 나무의 진정한 존재감은 나무가 없어진 뒤에 절실히 느껴집니다. 썩어 병들었거나, 장독대를 넓히기 위해 베어내거나…. 얄궂게도 너무 늦게 다가오는 존재감입니다.
사는 동안, 감나무처럼 누구에게 부담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편안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거죠. 그러나 그대로 잊히지만은 않았으면 정말 더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감나무 없는 시골 마을, 빨갛게 익은 까치밥 한 알 대롱대롱 매달린 감나무 한 그루 없는 시골 마을을 생각하기 어렵듯, 내 빈 자리가 누구에게라도 느껴질 수 있는 의미 있는 사람으로 남는다면 바랄 게 없겠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