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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여행자의
슬기로운 여행법

김가람 KBS 교양다큐멘터리 PD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여행 프로그램을 보면서 생각한다.
저 PD는 무슨 복이길래 여행하면서 돈을 벌까!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건 여행이라기보단 카메라 7대를 이고 지고 고군분투하는 ‘생존’에 가깝다.
촬영부터 편집, 드론 조작에 내레이션 대본 작성까지 일인다역을 소화하며 세계 곳곳을 담은 김가람 PD는 어느 날 알게 됐다.
이 아름다운 지구별을 계속 여행하려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글 차예지(편집실) / 사진 김성재(싸우나스튜디오)
  • 김가람 KBS 교양다큐멘터리 PD
  • 사람을 만난다는 건 한 세계를 만나는 것
    • Q
    •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약 2년간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제작하셨죠. 원래 여행을 좋아하셨나요?

    제가 어릴 때 대구에서 자랐는데요, 한 번도 전학이나 이사를 하지 않고 한동네에 쭉 살았거든요. 그래서인지 늘 어딘가로 튀어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걸 억누르면서 살았어요. 회사에 입사하면서부터 3~4일 정도의 짧은 휴가만 생겨도 틈을 내서 여행을 다녔어요.

    • Q
    • 처음으로 갔던 여행지는 어디였나요?

    제가 다닌 중학교가 일본의 한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었던 곳이었어요. 그래서 그때 일본에 있는 친구가 우리 집으로 와서 같이 지내기도 하고, 반대로 제가 일본으로 가서 지내기도 했죠. 그때부터 ‘나와 완전히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게 되게 재밌는 일이구나’ 생각했어요. PD라는 직업을 택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어요. 교양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서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저는 순전히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었거든요.

    • Q
    • 역마살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게 있을 수도 있겠어요. 요즘 많이 하는 MBTI 성격 검사를 하면 즉흥적인 성향이 나올 것도 같네요.

    맞아요. 그리고 그런 성향이어야 PD라는 직업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여행도 방송도 내가 200%를 준비하면 막상 결과물은 60%밖에 안 나온단 말이에요. 그게 반복되니까 오늘 뭐가 잘 안되면 내일은 잘 되겠지, 해요. 여행이라는 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투성이잖아요.

    • Q
    • PD는 카메라 뒤에 있는 게 익숙하잖아요. 직접 출연하는 게 어색하진 않았나요?

    많이 어색했어요. 하하. 근데 그게 포인트예요. 전문 여행가가 아닌 사람이 그냥 여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PD가 게임 속의 플레이어가 되고, 시청자들은 그 플레이어가 여러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걸 보면서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거예요. PD가 카메라 앞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밥 먹고 그러는 게 색다른 재미로 다가오는 거죠. 여행지에서 겪을 수 있는 돌발상황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요.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맡고 처음 아르헨티나에 갔을 때 거기가 바람이 그렇게 많이 부는 지역인지도 몰랐고, 시간도 너무 부족해서 사진을 10장도 채 못 찍었어요. 옷도 바람막이 하나 입고 다니고요. 시청자 게시판에 ‘제발 등산복 입고 미술관 좀 가지 마라’는 내용의 글이 올라올 때가 있는데, 즉흥적인 상황이 워낙 많아서 그래요.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제작 비하인드를 나누는 김가람 PD ⓒ tvN D ENT 유튜브 채널
  • 김가람 KBS 교양다큐멘터리 PD
  • 몸으로 느끼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
    • Q
    • <환경스페셜>을 통해 환경 문제를 다룬 다큐를 제작하셨죠.
      원래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었나요?

    전혀요. 환경 문제가 논의된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기에 내가 사는 동안 최대한 누리면서 잘 살아야지 하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2020년 4월에 <생로병사의 비밀> 팀에 배정받았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병원 취재가 너무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색다른 취재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인터넷에 ‘전국에서 암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마을’을 검색하게 됐어요. 취재하다 보니 그런 지역이 다 환경 문제가 있는 곳이더라고요. 우리가 서울에서 만드는 쓰레기들이 어딘가로 가서 태워지거나 묻히고, 그게 누군가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걸 알게 됐죠. 그전에는 저도 ‘이렇게 계속 물건을 만들고 써도 어딘가에서는 재활용되거나 친환경적으로 잘 처리가 되겠지. 감당이 가능하니까 계속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예요.

    • Q
    • 기온도 점점 오르잖아요. 이번 여름도 평년보다 빨리 찾아온 것 같고요.

    여름이 되면 환경 관련 책이 잘 팔린대요. 사람들이 더위로 문제를 체감하는 거죠. 한계점이라는 게 있잖아요. 어느 순간 정말 생존에 와닿는 문제가 생기는 순간이 올 테니까 이 일을 계속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환경 문제에 있어서 일종의 문화가 만들어지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예를 들어 음료를 사러 갈 때는 컵을 가져가는 게 당연하고, 제로웨이스트 샵이 편의점만큼 많이 생겨서 가기 편해지는 거요. 내가 제로웨이스트 샵을 가고 싶은데 멀리 있어서 차를 타고 가야 한다면 그만큼 탄소가 배출되잖아요. 그러면 모순이니까요.

    • Q
    • <환경스페셜 –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 제작 후 옷을 거의 사지 않으신다고 들었어요.

    환경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이유로 금욕 생활을 하려고 그랬던 건 아니고요. 패션에 대한 판타지가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요? 한정판, 셀럽들이 착용해서 화제가 된 아이템도 잘 안 팔리면 떨이로 팔아버리고, 그래도 안 팔리면 결국 다 태운다는 걸 알게 되니 거기에 내가 열심히 일해 번 돈을 쏟아붓는 게 의미 없다고 느껴졌어요. 패션 업계의 유행도 결국 새로운 물건을 팔기 위해서 만들어 내는 거잖아요. 바지통을 넓혔다 좁혔다, 부츠 길이를 길게 했다 짧게 했다… 그 장단에 맞춰서 뭔가를 계속 사는 것에 흥미가 떨어진 거죠. 저는 원래 회사에 갈 때도 일주일 동안 겹치는 옷을 절대 입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옷도 신발도 좋아했고요. 지금은 필요한 옷이 있으면 사냥하듯이 쇼핑해요. 예를 들어 흰 블라우스가 필요하면 백화점에 가서 매장마다 들러 흰 블라우스를 입어봐요. 그리고 최소 5년 이상 입을 걸 생각하고 마음에 쏙 드는 걸로 사요. 오늘 입은 옷도 제가 강연하러 가거나 인터뷰 촬영이 있을 때 늘 입는 옷이에요.

    • Q
    • 일부 패션 브랜드에서는 안 입는 옷을 매장에 가져다주면 할인 쿠폰을 지급합니다. 수거한 옷은 재활용해 새로운 상품으로 만든다고 하죠. 이게 진짜 환경에 도움이 될까요?

    유럽과 같이 환경에 관심이 많은 곳에서는 비판받았던 캠페인이에요. 쿠폰을 준다는 건 결국 옷을 하나 더 사라는 거잖아요. 재활용이 환경에 도움 되는 건 맞지만, 그러면 고객들은 ‘어차피 재활용되니까 새 옷을 사는 게 환경을 파괴하는 게 아니네?’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우리가 입는 대부분의 옷은 합성 섬유고, 결국 플라스틱이에요. 요즘 고객들이 환경에 관심이 많으니 기업에서는 뭐라도 해야 하는데, 생산량을 줄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재활용을 내세워서 고객이 착각하게 만드는 거죠. 재활용 소재가 함유된 옷을 사면 왠지 지구를 살리는 데 일조하는 것 같잖아요. 그 옷도 결국은 플라스틱이고, 지구에 몇백 년을 머무는데 말이에요. 새로운 물건을 계속 소비하는 건 투표하는 것과 비슷해요. 플라스틱을 하나 더 만들어도 된다는 쪽에 투표하는 거죠.

    김가람 PD가 연출한 <환경스페셜 –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 ⓒ KBS 다큐 유튜브 채널
    • Q
    • 세계 곳곳의 명소들이 오래 보존돼야 계속 여행을 갈 수 있겠죠. 그런데 역설적으로 여행하다 보면 일회용품을 많이 쓰게 돼요. 숙박업소에는 늘 어매니티가 있고요.

    하얏트나 메리어트 같은 대형 호텔 체인들은 이미 2019년부터 일회용품을 제한하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도 지난 3월에 관련 규제가 시작됐는데, 반발이 있었죠. 어매니티를 제한할 거면 숙박비를 낮추라는 의견도 있었고요. 우리가 ‘환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몇 년 전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 비 오는 날 옷을 구매했던 적이 있어요. 옷을 잘 포장한 뒤에 종이가방에 넣고, 그걸 또 비닐백에 담아 테이프로 입구를 봉하더라고요. 비를 맞지 않게 하려고요. 마지막에 예쁜 리본까지 둘러줬죠. 그 옷이 비싼 것도 아니고 한화로 2만 원 정도였는데도요. 그걸 보면서 ‘이게 손님을 환대하는 거구나, 장인정신이다’ 생각했는데요.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무료로 서비스받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실은 다 지구에 남고, 나는 어떻게든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어매니티도 마찬가지로 투숙객에 대한 환대 개념이지만, 공짜가 아니구나 생각하니까 손을 대기 어려워지더라고요.

  • 김가람 KBS 교양다큐멘터리 PD
  • 여행은 계속된다
    • Q
    • 대구에서 자랐으면 부산에도 자주 방문하셨겠어요.

    부산은 제 기억에 푸근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여행지예요. 기장군 정관읍에 친척들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자주 갔거든요. 그 집에서 닭을 키워서, 놀러 가면 신선한 달걀을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나요. 부산은 남편과 함께 여행 가기에도 참 좋은 곳이에요. 제 남편이 라트비아 사람인데 부산을 되게 좋아해요. 왜냐면 남편이 나고 자란 리가(Riga)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 건물 양식이 보존된 곳이라 높은 건물이 많지 않거든요. 어디 수리라도 하려면 일일이 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곳이죠. 남편이 한국 오기 전에 덴마크에 있는 대학에 다녔는데 거기도 마찬가지로 높은 건물이 거의 없었대요. 근데 해운대에는 바다 근처에도 높은 빌딩이 있잖아요. 그 사람에겐 신세계인 거죠. 그래서 부산은 저도 남편도 좋아하는 여행지예요.

    • Q
    • 모든 여행은 돌아올 때 아쉽지만, 특히 아쉬움이 많이 남는 곳들이 있죠. PD님에게도 그런 여행지가 있나요?

    좋은 곳을 발견했는데 금방 돌아와야 할 때 그런 기분을 느껴요. 제가 책에도 썼는데, 이탈리아 여행 때 우연히 볼차노라는 지역을 방문했거든요. 기대 없이 갔던 곳인데 알프스산맥에 둘러싸인 풍경이 아름다워서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근데 다음 일정도 있었고, 볼차노에 숙소를 오래 잡기도 어려워서 금방 떠나야 했죠. 그리고 3년 후 어머니와 함께 그곳을 다시 찾았어요. 처음 갔을 때 컵 받침을 샀던 가게가 있는데 3년이 지나 다시 찾았을 때도 모든 게 그대로더라고요. 거기서 엄마와 티스푼을 샀던 기억이 있네요.

    • Q
    • 올여름 휴가 계획이 있나요? 세계 곳곳을 다니셨기에 다음엔 어디로 떠나실지 궁금해요.

    이탈리아 시칠리아로 조금 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어요. 날씨가 더운 곳이라 5월 말에 갔다 왔는데도 새까맣게 탔죠. 제 직업상 언제 휴가를 갈 수 있는지가 불투명하다 보니 쉴 수 있는 때에 맞춰 적절한 곳을 찾아요. 현지 날씨와 비행기표의 가격을 고려해서요(웃음). 아직 오세아니아 쪽을 안 가봐서 그쪽도 재밌을 것 같고요, 아프리카 중부도 안 가봤어요. 이슬람 문화권도 많이 가 보지 않아서 궁금해요.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도 좋지만 조금은 특이한 여행지를 찾아가 보고 싶어요.

여행을 100% 즐기는 김가람 PD의 마음가짐
  • 1. 마법의 주문 ‘다행이다’

    여행 중에 일이 꼬이면 ‘다행이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뇝니다. 날씨가 엉망일 때, 동행과 싸웠을 때 모두 유용합니다.
    집 나가면 고생인 거 이미 알고 왔으니, 짜증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사고 안 나고 안전히 여행해서 다행이다, 일행이 건강해서 다행이다….
    여행지에서의 1분 1초는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시간이기에 감사히 여기려고 합니다.

    2.여행의 고수는 없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PD고 여행 에세이도 썼으니 제게 특별한 여행 비법이 있을 거라 기대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경남 하동에서도,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에서도 외딴 길에 혼자 남겨진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돌아와서 또 나갈 궁리를 하는 건
    모두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에요. 평생 돌려받지 못할 친절을 베풀어준 이상한 사람들요.
    그분들이 내어준 친절을 나뭇잎처럼 하나씩 하나씩 밟고 지금까지 여행을 이어올 수 있었어요.

    • 명사소개

      김가람

      KBS 교양 다큐멘터리 PD. <걸어서 세계 속으로> <환경스페셜>, <생로병사의 비밀> 등 다수의 프로그램을 연출했다. <환경스페셜 –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로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책 《걸어갑니다, 세계 속으로》를 썼고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 ‘감독의 세계’ 편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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