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티켓파워를 자랑하는 국민배우 송강호는 그 이름만으로도 기대감을 주는 무조건 믿고 보는 배우이다.
흥행 성적뿐만 아니라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살인의 추억> <괴물> <박쥐> <택시운전사> 등
수많은 명작을 만들어내는데 큰역할을 담당한 송강호의 연기 스펙트럼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넓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과 감동을 주었던 그가 이제 또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글 이화정 씨네21 기자 사진 씨네21 제공
클로즈업된 이두삼의 얼굴 하나하나에 <넘버.3>(1997) 삼류 건달의 코믹함이, <살인의 추억>(2003) 형사 박두만의 페이소스가, <복수는 나의 것>(2002)의 아이를 잃고 극한에 몰린 아버지의 딜레마나 <남극일기>(2005)의 탐험대장의 핍박한 내면들이 어우러진다. 지난 20여 년간 우리가 알아 왔던 송강호의 모든 얼굴이 숨 돌릴 틈 없이 펼쳐지는, 송강 호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연기다. <나랏말싸미> 촬영 으로 바쁜 와중에 지방 촬영장에서 급히 올라왔다는 송강호를 만나, <마약왕>의 이두삼을 소환해봤다.
<택시운전사>(2017) 이후 차기작으로 <마약왕>은 파격적인 선택이 아닌가 싶다. 두 영화는 어떤 차이가 있나.
사실 <택시운전사>는 마음이 무거운 영화다. 배우 입장에서도 무거운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는데, <마약왕>은 그런 점에서 좀 신났다. 어깨의 힘을 내려놓고, 연기자로서 마음껏 놀고 싶은 그런 지점을 준 작품이었다. 물론 한 인간의 파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마냥 가벼운 톤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인 궤에서는 오래간만에 하는 즐거움, 신남이 있었다.
최근의 선택을 돌아보면 ‘배우 송강호는 무게 있는 역할, 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기도 했다.
그 지적을 나도 많이 느꼈다. 어느샌가 많은 분들이 송강호에 대해 ‘아, 이거 하겠어?’ ‘이런 건 안 할 거야’ 그런다고 하더라. 희한한 거다. 자체적으로 1차 검열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시나리오가 오기도 전에 다 걸러지는 거다. 그러다보니 ‘송강호는 사회적 함의를 지닌, 묵직한 메시지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다’라는 선입견이 형성돼버린 거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마약왕>이 들어왔을 때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20여 년 전 송강호의 모습, 좀 어설프지만 흥미를 주는 캐릭터의 모습이 이두삼에게 있더라. 대표적으로 <살인의 추억>의 형사 박두만 캐릭터나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넘 버.3>, <초록물고기>(1997)의 삼류 건달 이런 모습들이 막떠오른다. 15년 이상 그런 모습을 못 보았으니 관객도, 나도 갈증이 생기는 거다. 물론 젊은층 중에는 나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분도 있겠지만. (웃음)
당 시 는 사 회 적 가 치 가 다 양 하 지 않 고 획 일 화 된 시 대 였 다 .
그 시 대 에 는 그 게 맞 다 고 생 각 하 고 그 렇 게 살 았 다 .
10년의 시간을 두고 변해가는 이두삼을 통해 한 인물의 연대 기를 그린다. 그동안의 송강호 연기의 일면들을 조금씩 모자 이크한 종합판 같은 시도였다.
한 인물의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으니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처음에는 소시민적이고 좀 우스꽝 스러운 모습도 있고 허풍도 있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이다가, 점점 더 새로운 세계를 만났을 때의 혼란스러운 모습들, 그리고 그 세계 안에 들어가서는 자기가 가진 것을 절대 놓치려 하지 않는 야망이 나온다. 그릇된 야망인 거지.
그 감정과 행동을 한 작품에서 다 보여주니 내가 이전에 연기한 모습들이 조금씩은 녹아들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약왕>은 그 내면을 보여주며 나아가는 후반부에서 전작 과는 결이 달라지는데, 영화의 톤도 그 지점에서 바뀐다.
그게 이 영화의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사실 좀더 다른 톤의 버전도 찍었다. 그렇게 가니 익숙하긴 한데 매력이 없더라. 우리 영화가 가려는 방향과 맞지 않았다. 영화로 인해 마약을 미화하자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 악을 행한 범죄자들의 말로를 통쾌하게 보여주자는 의도나 또 교육적인 걸 주고자 함도 아니었다. 오히려 마약이 결국은 인간을 파괴한다는걸 반추하는 과정이었지만, 이 영화로 질문을 던지고 싶었 다. 연기를 하다보니 그런 방향이 더 짙어졌는데, 결론을 파격적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감독의 결단이었다. 우리는 감독의 그 결정을 존중해주고 박수쳐주는 거다.
이두삼은 부산 민락동에서 ‘마약왕’이 체포되는 한 장의 사진 에서 이미지를 그렸다고 하는데, 캐릭터에 어떻게 접근했나.
물론 영화 속 이두삼은 그의 이야기는 아니다. 당시 활동하던 비슷한 마약왕들이 꽤 있었다고 하더라. 70년대 한국 사회에, 특히 부산에서 그들의 활동으로 마약이 발을 붙이게 된거다. 그 분위기 안에서 이두삼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나갔다.
어릴 적 <스카페이스>(1984) 같은 작품도 보고 자랐고 최근 <나르코스> 같은 드라마들도 봤지만, 사실 마약을 다루는 범죄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이든 멕시코든 마약이 유통되는 과정, 카르텔은 비슷하다. 그래서 특별히 한국적이라든지, 새롭게 하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그쪽 세계에 대한 인식은 같이 가지고 가면서 접근했던 것 같다.
차기작 <기생충>은 봉준호와 송강호의 재회라는 점에서 기대하게 된다. 스틸만 봐도 묵시록적인 <설국열차>(2013)의 장중함과는 아주 다르더라.
전혀,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웃음) <기생충>은 한번도 보지 못한 그런 이야기, 익숙하면서도 기묘한 느낌이다. ‘봉 준호의 영화’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영화고, 봉준호가 사회를 향해 던지는 회심의 발언이 있다. 지금 촬영중인 <나랏 말싸미>는 정말 아름다운 한 편의 시를 읊는 그런 느낌이다.
아름다운 대사들도 많고, 지금까지 보지 못한 왕 세종의 모습이 나온다. <마약왕>부터 세 편 모두가 느낌이 많이 달라서 부담감도 크지만, 배우로서는 무척 흥분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