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여행지에서 한 달씩 살아보는 게 요즘 여행의 트렌드다.
여러 여행지 가운데 제주도는 ‘한 달 살기’에 주저 없이 손꼽는 곳이다. 그런데 한 달 살기를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말처럼 삶의 터전을 떠나 한 달씩 여행지에서 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달 살기는 로망이다. 그 로망을 좇아 설렘을 안고 제주도를 찾았다.
글.사진 임운석(여행작가)
태고의 원시림, 화순곶자왈 생태탐방 숲
남녘 제주지만 입동이 지난 탓에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좀더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어 더 남쪽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산방산이다. 1135번 지방도로를 이용해 제주도 내륙 깊숙이 달렸다. 도로는 한라산을 에두르며 이어졌다. 오르막길을 숨차게 달리던 차가 누운오름, 밝은오름, 동물오름, 당오름, 북오름 등 여러 오름을 지나자 내리막 길에 접어든다. 이윽고 서광교차로에 이르자 내비게이션이 뻥 뚫린 4차로를 뒤로하고 인적이 드문 2차로 길로 안내한다.
화순 방면이다. 길 끝나는 지점에 종을 엎어놓은 것처럼 봉긋한 형상이 보인다. 산방산이다. 목적지를 눈으로 확인하며 달리는 기분이 묘하다. 분명히 내비게이션만 보고 가는 것과 차이가 있다. 뚜렷한 목표가 보이고 그것을 향해 달려갈 때 점점 더 가까워진다는 것. 인생살이도 이처럼 명쾌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계속해서 달린다. 점점 산방산에 가까워질 무렵 화순곶자왈 생태탐방 숲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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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은 숲을 뜻하는 ‘곶’과 덤불을 뜻하는 ‘자왈’의 합성어로서 덤불이 우거진 숲을 일컫는 제주 사투리이다. 돌무더기로 인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땅이었으므로 방목지로 이용하거 나, 숯을 만들기 위해 땔감을 얻거나, 약초 등의 식물을 채취 하던 곳으로 이용되었다. 방치되다시피 한 불모지의 땅이 최근엔 북방한계 식물과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숲으로 알려지면서 제주 생태계의 허파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나 곶자 왈은 전 세계에서 제주도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곶자왈엔 적요만 가득하다. 덤불이 뒤엉켰다. 마치 인간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원시림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을까. 생태탐방 숲으로 지정된 이곳엔 생태보호를 위해 탐방로가 잘조성돼 있다. 숲속으로 발길을 들인다. 한 줌 햇살이 덤불을 뚫고 숲 깊숙한 곳까지 빛을 밝힌다. 빛이 없는 곳은 어둑어 둑하다. 그만큼 숲이 촘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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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덤불이 우거진 화순곶자왈
화순곶자왈 생태숲길은 9km에 이른다. 그 넓은 면적에 화순곶자왈에는 멸종 위기 식물인 개가시나무, 새우난, 더부사리고사리와 세계적 희귀종인 긴꼬리딱새, 제주휘파람새 등 50여 종의 동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탐방로는 세 코스로 나뉜 다. 산책로가 잘 조성된 기본 코스는 30~40분 정도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산책 중에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전망대다.
세 코스 모두 전망대로 향하고 있으니 어느 코스를 선택해도 괜찮다. 전망대에 오르면 곶자왈 주변 초원에서 소나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전망대 서남쪽에는 산방산이, 동북쪽에는 한라산이 봉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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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산방산은 화순곶자왈을 지나면 마주보고 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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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곶자왈은 다양한 식물이 공존하는 숲이다.
설문대할망이 툭 쳤더니 산방산이 되니라
화순곶자왈에서 4km를 더 달리자 산방산(395m)에 이른다.
산방산은 보기에 따라 종처럼도 보이기도 하고 모자나 투구 모양으로도 보인다. 우락부락한 바위로 이루어진 덕분에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듯하다. 산방산 200m 기슭에 길이 10m, 높이 5m, 너비 5m의 천연 석굴을 활용한 산방굴사와 보문사, 광명사, 산방사 등 사찰이 자리한 까닭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산방산은 화산활동으로 생긴 지형이다. 점성이 높은 조면암질 용암이 흐르지 못하고 계속 쌓이면서 분화구가 없는 용암돔 형태로 굳어져 종이나 모자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375m 산방산 정상은 일반인들이 오를 수 없다. 해서 산책길은 산방굴사까지 나 있다.
제주도 탄생 설화에 따르면 설문대할망이 제주도를 만들었 다고 전한다. 할망은 키가 엄청나게 크고 힘이 센 여신으로 한라산도 직접 흙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산이 너무 높아 한라산 정상 봉우리를 꺾어 던졌더니 산방산이 됐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신화에 불과하지만, 백록담 분화구와 산방산의 둘레가 엇비슷해서 그런지 그럴싸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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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용머리해안 주변 해변에서 낚시하는 강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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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C코스 황우치해변으로 가는 길
태곳적 제주를 마주하다, 용머리해안
용머리해안으로 가는 길목에 이국적인 범선이 보인다. 1653년 8월 16일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스페르웨르 Sperwer 호가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 것을 재현해놓은 것이다. 이 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 Hendrik Hamel (1630~1692)이 타고 있었다.
하멜은 제주도에 표착한 이후 일본으로 탈출할 때까지 13년 간의 조선 억류생활을 자세히 소개한 보고서 형태의 《하멜표 류기》로 조선을 서방세계에 최초로 알렸다. 범선 모양으로 제작된 하멜 상선 전시관에는 당시 항해 서적과 동인도회사의 무역활동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를 전시 중이다. 특히 모형을 활용한 선원들의 생활상을 재현해놓아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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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지질트레일 B코스 사계포구 마을의 전경
전시관을 빠져나오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낯선 풍경을 마주한다. 그 풍광은 마치 태초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누구나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제주도는 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지질 공원과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만큼 세계적 지질 자원의 보고로 명성을 얻고 있다.
산방산과 용머리해안 권역을 지질 트레일이라 부르는데 트레일 코스는 세 코스로 나뉜다. A코스는 용머리해안을 중심 으로 봉수대와 같은 산방연대와 산방굴사를 잇는 약 2km 구간으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여기에 사계포구를 거쳐 마을 안길까지 걸으면 B코스가 된다. 약 2.5km 구간으로 1시간 30분 이상 걸린다. 마지막 C코스는 산방연대에서 황우치 해변을 따라 약 5.7km 구간이다.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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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바람이 강한 탓에 가장 짧은 A코스를 선택해 길을 나선 다. 참고할 것은 용머리해안은 바람이 거세거나 파도가 높은 날에는 관람할 수 없다.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1년 중 관람 가능한 날이 200일이 채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남부발전 남제주발전본부에 근무한다면 문제되지 않는다. 용머리해안 동쪽에 자리한 황우치해안 너머에 본부가 있기에 날씨가 좋은 날이면 언제든지 산책 삼아 태곳적 제주를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한 달 살기’를 넘어 ‘제주 살기’를 하는 그들이 잠시 부러워지는 대목이다.
용머리해안은 바닷물과 마그마가 접하는 환경에서 분출 활동이 일어나 만들어진 수성응회암이다. 그런 까닭에 완만한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어 걸어서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다.
지층의 일부는 책을 겹겹이 쌓아놓은 것 같은 전라북도 부안의 채석강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모양이 더 기괴 하고 다양하다. 그것은 상상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태초의 제주이며 인간의 계산방식이나 값을 구하기 어려운 영원한 수수께끼 같은 시간의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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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Information
내비게이션 정보
▷산방산, 용머리하멜상전전시관, 용머리해안(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남로 216번길 28 용머리 공영주차장) ▷화순곶자왈 생태탐방숲길(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 2045)
문의
서귀포시청 관광진흥과 064-728-2754
지질공원 탐방안내소(산방산·용머리해안) 064-792-3363
한국남부발전 남제주발전본부
사우가 추천하는 맛집
제주도의 드넓은 바다와 산방산의 풍경을 감상하기 딱 좋은 곳에 자리한 생원전복. 이곳은 제주도산 고사리와 직접 만든 반찬으로 입맛의 풍미를 돋운다. 가장 인기가 많은 전복돌솥밥은 전복과 전복 내장이 가득 들어있어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주소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로 7
전화 064-792-2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