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중부 베르너 오버란트 알프스는 4000m급 봉우리들이 산악마을을 품고 있다.
벵엔, 뮈렌, 그린델발트 등은 해발 1000~2000m 사이에 들어선, 베르너 오버란트 알프스의 대표 마을들이다.
젖소의 흔적이 가득한 옛 마을은 산악 액티비티의 아지트로, 전기 자동차만 다니는 청정공간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어느 골목을 서성이든, 세모지붕을 어루만진 순풍에는 정갈한 알프스의 흙 냄새가 실린다.
글 사진 서영진(여행 칼럼니스트)
빙하 녹은 물이 에너지가 되다
융프라우, 묀히, 아이거 등 알프스의 높은 봉우리들은 이곳 산악마을의 든든한 배경이다. 봉우리와 이어지는 빙하는 마을과 계곡을 거쳐 인터라켄의 호수로 흘러든다. 빙하가 녹아내린 물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역인 융프라우요흐와 산악마을, 열차들의 주요 에너지원이다. 풍부한 수량으로 만든 수력전기는 주민들의 든든한 생활원천이 되고 있다.
알프스 산맥을 끼고 있는 스위스는 전기에너지의 60% 가까이를 수력발전에 의존한다. 융프라우로 대표되는 이곳 베르너 오버란트 알프스 지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산악마을 중 벵엔, 뮈렌 등은 전기차만 다니는 무공해마을이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교통수단은 산악열차가 유일할 뿐 산 아래 차량들은 닿지 못한다. 마을에는 전기로 운행되는 소형차들만이 골목길을 유유자적 누빈다.
스위스는 신재생에너지에 있어서는 선두주자다. 태양광 방음벽은 1989년 스위스 쿠어 지역 고속도로에 세계 최초로 설치됐다. 스위스에서 제작한 태양광 비행기 ‘솔라 임펄스’는 2012년 태양광 비행기로는 최초로 유럽 아프리카 첫 대륙간 비행에 도전했다. 마테호른 봉우리에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케이블카역과 레스토랑이 태양 에너지로 가동 중이다.
스위스는 친환경에너지에 대한 발 빠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050년까지 원자력발전을 수력, 풍력, 태양광 발전등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내용의 법안을 국민투표로 가결시켰다. 알프스 일대에는 천연자원인 바람과 물을 이용, 즉석에서 에너지를 만들어 산악지대 공사현장에 전기를 공급하는 이동식 에너지 공급 회사도 등장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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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알프스의 빙하와 물 등은 스위스 에너지의 원천이 되고 있다.
02 융프라우, 아이거 아래 산악열차는 강렬한 풍경으로 다가선다.
03 산악마을 벵엔은 전기차가 도심을 오가는 청정마을이다.
전기자동차만 다니는 청정마을
베르너 오버란트 알프스의 가장 정점에 위치한 산악마을은 뮈렌이다. 1639m에 자리 잡은 마을은 지대가 높아 아이거, 융프라우, 묀히를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다. 샬레풍 가옥의 지붕에는 집이 만들어진 년도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창문 위는 방울과 산양 머리뼈로 장식돼 있다.
산악마을들이 매력적인 것은 무공해 교통수단과 함께 숱한 트레킹 코스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거친 숨으로 산을 오르지 않더라도 높은 곳에서 발걸음을 시작해 산 아래를 감상하며 내려설 수 있다. 이 일대에만 70여 개, 총 200km의 다양한 하이킹 루트가 있는데 능선과 능선을 잇는 트레킹 코스는 꼬박 한나절이 걸리기도 한다.
해발 1275m에 위치한 벵겐에서는 앙증맞은 전기차가 거리를 오가는데 소음도, 먼지도 없다. 덜컹거리는 열차소리와 나지막하게 나누는 마을 사람들의 대화만이 골목에 맴돈다.
벵겐, 뮈렌에서는 아침에 치즈가게에 들려 “Guten morgen!(굿모닝)”을 해보고, 갓 구워낸 빵도 맛본다.
스위스 특유의 사우나를 갖춘 호텔에서 보내는 것 역시 독특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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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융프라우의 빙하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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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하더쿨룸에서 조망한 인터라켄과 호수 전경.
아이거 북벽에 실린 도전과 사연
베르너 오버란트의 산악마을 여행은 설렘이 또 다른 설렘을 낳는다. 그린델발트와 라우터브룬넨을 출발한 열차가 집결하는 곳은 클라이네샤이덱역이다. 아이거 북벽 아래 클라이네샤이덱은 수많은 산악인들을 등진 사연이 서린 곳이다.
알프스의 3대 북벽 중 하나인 아이거 북벽은 한때 등반금지령이 내렸을 정도로 험난한 코스였다. 70여 년 전초등 등정을 위해 사투를 벌였던 청년 등반가들의 도전과 떠남의 이야기는 빛바랜 철로 위에 남아 있다. 그들의 도전 정신을 기리며 매년 봄이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도의 설원에서 스노우펜 에어 콘서트가 열리기도 한다.
클라이네샤이덱에서 열차를 타고 ‘Top of Europe’이라 불리는 융프라우요흐에 오르면 알프스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융프라우와 알레치 빙하의 민낯이 눈앞에 펼쳐진다. 융프라우요흐에서는 열차 시간에 쫓겨 서둘러 떠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야외 스노우펀 지역에서는 한 여름에도 스키, 눈썰매 체험이 펼쳐진다.
빙하를 따라 봉우리옆 묀히 산장까지 이색 트레킹을 즐길 수도 있다. 빙하 트레킹은 세계자연유산 위를 걷는다는 아득한 감동과 함께한다. 묀히 산장에서는 온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대용량 마운틴 커피 한 잔을 맛볼 수 있다. 고된 여정 뒤에 경험하는 그 커피 맛이 또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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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알프스의 봉우리와 호수는 하이킹 코스로 연결된다.
설산을 가르는 하이킹 & 액티비티
융프라우 일대의 산악마을들은 다채로운 액티비티로 맥박수를 높인다. 봄이 오면 그린델발트의 호흡이 빨라진다.
트레킹 시즌에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이방인들이 어우러져 마을이 흥청거린다. 그린델발트에서 즐기는 액티비티들은 휘르스트에서 풍성하다. 휘르스트역 옆에는이 일대 최고의 패러글라이딩 출발 포인트가 자리잡았다.
2000m 넘는 곳에서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를 바라보며 하늘을 나는 체험은 또 다른 묘미다.
해발 2168m의 휘르스트역에서 바흐알프호수까지 이르는 트레킹 코스는 평이하고 아기자기해 가족 단위로 걷기에 좋다. 2시간 남짓 이어진 트레킹은 호숫가에서 단말마의 탄성을 내는 것으로 쉼표를 찍는다.
휘르스트 액티비티의 재밋거리는 하산 길에도 숨어 있다.
휘르스트역에서 플라이어와 글라이더를 타고 케이블에 매달려 800m 거리를 시속 80여 km로 하강하거나 페달 없는 트로티바이크로 그린델발트까지 내리막길을 1시간가량 유유자적 달릴 수 있다. 알프스의 ‘흙’에 기대고 ‘향기’를 맡는 일들은 이렇듯 상상을 뛰어 넘어 진행된다.
산 아래로 내려서면 풍경은 설산을 털어내고 한결 포근해진다. 어느 마을에 머물든, 땅거미가 내리면 노천바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이곳 전통맥주인 루겐브로이로 갈증과 피로를 달랜다. 산악마을 간이역 뒤편으로 이어지는 골목에서 앙증맞은 가게와 고풍스런 집들을 만나는 것도 따사로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