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진안의 데미샘에서 시작한 작은 물줄기가 큰물, 섬진강이 됐다.
유구한 물줄기는 생명체처럼 흘러 흘러 남해에 닿고 어느새 큰 바다, 태평양과 조우한다.
흐르는 물처럼 길을 따라 달려간 하동 땅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간다.
한낮의 따뜻함과 가을밤의 선선함이 공존하는 경상남도 하동을 다녀왔다.
글.사진 임운석(여행작가)
드넓은 악양 들판과 섬진강을 발아래 두다
화개장터 삼거리에서 섬진강 물길을 따라 9km 정도를 달리면 봄날의 흔적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십리벚꽃길이 시작된다. 그 지점에 최참판댁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길에 접어들면 도시인에게 생소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동 평사리는 시원스레 펼쳐진 황금들녘과 섬진강의 아름다운 풍광 덕분에 박경리(1926~2008)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됐다.
악양들녘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가로수로 심어 놓은 감나무가 눈에 띈다. 탐스러운 홍시가 주렁주렁 열렸지만 수확하는 사람이 없다.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녀석들은 땅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 그래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다. 홍시가 땅바닥 여기저기 바짝 엎드린 채 뱃속을 다 드러내고 드러누워 있다. 그럼에도 마을 주민들은 무심하다. 그 이유는 악양마을은 우리나라 홍시 중에 가장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대봉감 생산지다. 값어치 없는 가로수 감나무 홍시를 나 몰라라 할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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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뒤로 드넓은 황금들녘이 펼쳐진다. 들판의 곡식은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누렇게 익어간다. 높고 푸른 하늘은 시나브로 땅과 인사를 나누고 색을 섞는다. 그곳에서 붉은 기운이 감돈다. 악양들녘은 가을 정취를 온몸으로 느끼기에 제격인 여행지다. 누렇게 익어 머리 숙인 벼 가운데 군계일학처럼 서 있는 소나무가 위엄 있다. 부부송이다. 어떤 이는 부부송을 가리켜 「토지」 속 주인공인 ‘길상’과 ‘서희’ 소나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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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한산사 앞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악양들녘과 섬진강
악양들녘을 한눈에 내려다보기 위해 한산사 앞 전망대로 향한다. 전망대에선 바둑판 모양으로 반듯하게 정돈된 황금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은 아래에서 보는 것과 사뭇 다르다. 한결 더 넓고 장대하다. 들녘은 일망무제하게 펼쳐지다가 형제봉과 구재봉에 막혀 멈춰 선다. 두 봉우리 모두 지리산 자락이다. 지리산의 품이 얼마나 넓은가. 들판 오른쪽 1시 방향엔 섬진강이 도도하게 흐른다. 그 물결을 떠올리며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탈고했을 것이다. 5부 20권에 이르는 대하소설을.
소설을 1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통독한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도 우리 대다수는 이 작품을 잘 안다고 느낀다. 영화나 TV 드라마 등으로 여러 차례 제작된 데다 한 번쯤은 스토리를 살펴본 적이 있어서다. 불후의 명작, 바로 이런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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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최참판댁 담장에 가을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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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정갈한 한옥의 미가 전해지는 최참판댁
언덕배기에 초가와 기와집이 올망졸망 모여 앉았다. 「토지」드라마 세트장이 있는 곳이다. 세트라고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정교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다. 얼렁뚱땅 지은 세트와는 비교할 수 없다. 하동 8경에 이름을 올렸으니 어지간할까. 특산품 판매점, 체험공방 등을 지나면 언덕 위 평평한 곳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소설 속 공간을 재현한 아흔아홉 칸 최참판댁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돌담이 멋스러운 고샅을 사이에 두고 드라마 세트장과 실제 주민들이 사는 집이 어깨를 맞대고 옹기종기 붙었다.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통로인 게다. 사랑채엔 ‘명예 최참판’ 어르신이 앉아 있다. 그 역시 현실인지 가상인지 헷갈리게 한다.
많은 사람이 마네킹으로 착각할 정도이니 말이다. 사랑채 마루에 오르면 악양들판이 보인다. 이 순간만큼은 부자가 된 듯 헛기침 소리도 무겁다. 간간이 들려오는 ‘토닥토닥’ 다듬이 소리가 고향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을 평안하게 두드려준다
천 년의 향을 찻잔에 담다
십리벚꽃길 벚나무는 단풍을 오래 간직하지 못한다. 매몰찬 섬진강 바람 탓이다. 노랗게 물드는가 싶으면 못된 바람이 불어와서 나무와 나뭇잎을 생이별시켜 놓는다. 때문에 고운 단풍은 구경하기 어렵다. 도로 옆으로 차 나무가 가래떡처럼 가지런히 누워 함께 달린다. 흔히 녹차하면 전라남도 보성을 떠올리지만, 하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야생차나무가 있는 ‘차(茶)의 고장’이다.
우리나라에서 차를 마셨다는 기록은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데 신라 27대 선덕여왕(?~647)이 최초다. 또한 하동(화개)은 신라 때부터 왕실에 차를 진상하던 대표적인 ‘다소’였다. 고려 때에는 궁중에서 차를 취급하는 관청인 ‘다방’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동은 구한말까지 임금께 차를 진상한 곳이다. ‘왕의 차’란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하동은 자타가 공인하는 명품 차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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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바쁜 일정이 아니라면 차문화센터를 방문해 하동차의 진수를 맛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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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차의 시배지인 하동에서 생산되는 차는 대나무의 이슬을 먹고 자란 잎을 따서 만들었다고 해 ‘죽로차’라고도 하며, 참새의 혓바닥과 같은 작은 잎으로 만들었다 하여 ‘작설차’라고도 한다. 이처럼 하동 차가 유명해진 이유는 재배에 적합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졌기 때문이다. 차문화센터에 방문하면 차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물론이고 차 시음, 다례체험까지 가능하다.
차문화센터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차와 인연이 깊은 쌍계사가 자리한다. 840년에 창건한 쌍계사에는 국보 진감선사 대공탑비(국보 제47호)를 비롯해 부도(보물 제380호), 대웅전(보물 제500호) 등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또 쌍계사 진감선사가 차밭을 크게 조성해 널리 번식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차시배지 기념비도 있다.
가을의 전령사 코스모스가 머무는 북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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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북천역 코스모스단지를 달리는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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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북천역에 가면 푸른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꽃들의 향연을 볼 수 있다. 가을꽃의 대명사인 코스모스가 북천역은 물론 곤양천변과 주변 논밭 사이에서 새하얀 메밀꽃과 어우러져 다시 볼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한다. 북천의 코스모스는 노랑, 분홍, 다홍, 순백색으로 색이 다양하다. 짙은 원색보다 차분한 파스텔톤이다. 차분한 색감이 가을의 정취를 한결 더 깊게 해준다. 코스모스의 꽃말은 ‘소녀의 순애’다.
완숙의 가을이지만 코스모스에게 만큼은 완숙미보다 소녀의 순수한 감성이 더 잘 어울린다. 꽃잎이 가을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한들한들 움직이면 거대한 물결을 이룬다.
올해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무릇도 합세해 비장한 붉은색이 더해졌다. 이따금씩 먼 기적소리가 두어 번 울리고 나면 북천역으로 기차가 들어 온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사진가들이 모여들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아이돌 스타도 이보단 못하겠다. 가을의 서정이 묻어 있는 작은 역, 북천역은 감성 온도 36.5°C를 넘어 100°C가 되어줄 만큼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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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Information
내비게이션 정보
최참판댁(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차문화센터(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로 517-25), 북천역(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경서대로 2446-6)
문의
관광안내콜센터 1588-31863
악양종합관광안내소 055-880-2950(운영시간 10:00~17:00)
한국남부발전 하동발전본부
사우가 추천하는 맛집
푸짐한 맛과 양으로 승부하는 옛날 가마솥 돼지국밥. 국밥을 시키면 순대와 내장이 서비스로 나오고 면 사리도 함께 나와 다양한 맛으로 돼지국밥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가마솥에 직접 끓여 깊은 맛이 일품이며, 해마다 김치와 깍두기를 직접 담가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들포길 15
전화 055-882-9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