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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데도 기술이 필요한,
잠 못 드는 사회

유전자가 조작돼 25세 이후로는 노화가 멈춘다. 그러나 이때부터 팔뚝에 새겨진 ‘카운트 바디 시계’가 작동하고 단 1년의 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은 곧 돈이어서 무얼 사거나 할 때마다 줄어들게 된다. 시간을 더 벌지 못해 타이머가 0이 되면 심장마비로 죽게 된다.
시간 부자들은 영원히 살 수 있지만, 가난한 이들은 시간 걱정뿐인 2011년 개봉 영화 <인타임(In Time)> 속 세상이다.

박종훈(칼럼니스트)


주어진 시간은 8,760시간, 분으로는 525,600분이다. 커피 한 잔에 4분, 버스 요금은 2시간이다. 멋진 스포츠카를 사려면 59년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며 처음엔 저런 세상을 어찌 살까 싶었다. 식후 아메리카노 한 잔도 언감생심이 되고, 팔뚝의 타이머를 보며 자는 시간도 아까워 밤새 시간벌이에 혈안이 되어 돌아다녀야 하는 끔찍한 세상. 그러다 점점 저 영화 속 상상의 세상이 묘하게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뭐든 할 태세가 되어 있다. 현실의 나는 어떠한 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영혼을 팔 준비가 되 어 있지 않은가? 야근에 때론 밤샘을 밥 먹듯 하면서도 늘시간 부족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더 많은 시간을 갈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 인타임은 SF가 아니라 어쩌면 극사실주의 영화 였던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시간 부족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설렁설렁 사는 것도 아닌데, 주변엔 시간이 항상 부족한 ‘타임푸어(Time Poor)’족이 넘쳐난다. 일에 쫓겨 자신을 위한 자유시간은낼 틈이 없는 시간빈곤자들.
타임푸어는 라이프스타일 상 당연히 ‘슬립푸어(Sleep Poor)’ 로 이어진다.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잠을 줄여야 하는 수면빈곤자가 되는 것이다. 인생의 3분의 1은 잠을 자며 흘려 보내도록 태어난 호모 슬리피쿠스이건만, 현생 인류는 자연의 섭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살아가고 있다.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수면 중에서만 활발히 작동하는 뇌의 기능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기억의 저장과 삭제로 모든 걸 기억하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소중한 기억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린다. 두 번째는 성장 촉진으로 하루에 분비되는 성장 호르몬의 70%를 잠들고 나서 90분 이내에 분비시킨다. 세 번째는 노폐물 배설로 치매의 원인 중 하나로 알려진 베타아밀로이드(β amyloid) 등을 뇌척수액의 순환을 통해 배출한다. 이 말인즉슨 슬립푸어가 되면 잘 배우지도 못하고, 성장하지도 못하며, 치매 위험도 높아져 생명체로 온전히 살아가는데 심각한 어려움을 맞닥뜨릴 수 있다는 뜻이다.

슬립푸어를 위한 도우미, 슬립테크
다행히 센서와 통신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의해 슬립푸어 들의 위험을 다소나마 해소시켜 줄 방안들이 마련되고 있다. 슬립테크(Sleep Tech)는 ‘Sleep(수면)’과 ‘Technology(기 술)’의 합성어로 첨단기술을 활용해 수면 관련 데이터를 분석하고 수면을 돕는 기술들을 말한다. 대략 10여 년 전부터 제품이 나오긴 했으나 최근 수년 새 AI(인공지능), IoT(사물 인터넷), 빅데이터 등을 활용한 슬립테크 기술과 제품이 쏟아지며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가장 대중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슬립테크는 스마트워치 등웨어러블 기기나 센서를 스마트폰과 연계해 이용하는 것이 다. 센서를 통해 몸의 뒤척임, 심전도, 심박수 등의 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스마트폰 앱을 통해 클라우드로 전송해 AI로 분석하는 것이다. 깊은 잠(Non REMS)과 얕은 잠(REMS)의 시간과 비율 등을 분석한 후 수면 습관 개선을 위한 조언을 제공한다. 깊은 잠은 뇌와 몸을 휴식시키고 성장 호르몬을 분비하는 시간이며, 얕은 잠은 마음을 휴식시키고 기억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3:1의 비율이 이상적이라고 한다.
ICT와 결합한 침구류도 대표적인 슬립테크 분야다. 미국의 침대제조업체 슬립넘버(Sleep Number)는 2017년 CES에서 수면 센서를 장착한 스마트 침대를 선보였다.
스마트 침대는 수면 여부를 자동으로 인지하고 현재 수면 상태에 따라 침대에 포함된 공기의 양을 늘리거나 줄여 쾌적한 숙면을 유도한다. 가령 이용자가 코를 곤다면 스마트 침대는 머리 부분을 천천히 올려줘 코골이 증상이 완화되도록 지원한다. 국내의 침대 제조업체들도 뇌과학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스마트 매트리스를 개발하고 시판에 나서고 있다.

수면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빛을 제어하는 슬립테크 제품들도 있다. 미국의 스타트업 뉴로온(NeuroOn)의 스마트 안대는 피부 접촉 전극을 통해 사용자 맥박과 뒤척임은 물론 뇌파와 체온 정보를 측정해 수면 상태를 실시간 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빛을 차단하는 일반적 안대와 달리 수면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발광다이오드(LED)로 사용자 안면에 빛을 쏘는데, 낯선 곳에서의 수면이나 시차 적응 등의 효과를 인정받아 크라우드펀딩에 연이어 성공하고 있다.

왜 나라가 나의 잠을 걱정할까
수면(Sleep)과 경제(Economics)의 합성어인 ‘슬리포노믹 스(sleeponomics)’란 말도 있다. 슬립테크가 기술과 제품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슬리포노믹스는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돕는 모든 산업군을 일컫는 말이다. 의약품, 수면용품, 수면 관련 상담 및 치료 서비스 등을 모두 아우르며, 수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나타나는 사회경제적 트렌드를 가리키기도 한다.

잠이 부족하고 푹 자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슬리포 노믹스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슬리포노 믹스에 그리고 사람들의 수면 생활에 지극한 관심을 보이는 곳이 또 있으니 바로 국가와 기업이다. 잠을 잘 못자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나라와 기업의 건강도 나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슬리포노믹스에 가장 관심이 많은 나라는 일본이다. 유럽의 비영리 연구기관 랜드(RAND)는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일본을 대상으로 수면 부족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추정한 바 있다. 일본은 잠 부족으로 GDP의 2.92%인 1,380억 달러의 경제적 손해를 입고 있다. 금액으로만 보면 4,110억 달러의 손실을 입고 있는 미국보다 덜 하지만 GDP 대비 비율은 일본이 가장 컸다.

기업들도 경각심을 느끼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충분한 수면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생산성 저하는 물론 안전 사고 발생의 위험이 높기 때문에 기업에 경제적 손실을 야기 하고, 이는 기업의 평판 저해와 주가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앞으로 기업들은 입사 면접 시에 지원자들을 합숙시키며 수면 패턴을 몰래 체크하려 들지도 모른다.

슬립테크 (Sleep Tech)는
‘ Sleep(수면)’과
‘Technology(기술)’의 합성어로
첨단기술을 활용해
수면관련 데이터를 분석하고
수면을 돕는 기술들을 말한다


잠 권하는 사회를 위하여
OECD는 회원 36개국의 주요 경제, 사회, 문화, 정치지표 통계를 작성해 공개하고 있다. 수면 시간도 조사하고 있는데, 하루 수면 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는 일본으로 7시간 22분이다. 그 다음 짧은 나라는 대한민국으로 7시간 41분이다. 반면 캐나다는 8시간 40분, 미국은 8시간 48분으로 9시간 수면을 향해 가고 있다.

OECD의 지표 중 산출 요소로서 수면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다. 이 지수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일과 생활의 균형, 즉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다. 이 지수는 사람들이 여가와 개인적 돌봄에 쏟는 시간을 주당 50시간 이상 근무하는 노동자의 비율과 비교하여 얻어진다. 10에 가까 울수록 워라밸이 잘 잡힌 것인데 네덜란드(9.4), 이탈리아, 덴마크가 9점 이상이다. 한국의 워라밸 지수는 얼마일까? OECD는 4.1로 평가했는데, 조사대상국 중 밑에서 네 번째다. 일본은 4.6으로 한국 다음이다.

잠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잠을 마음 놓고
잘수도 없는 상황, 어쩌면
이 상황에 대한
플라시보(placebo, 위약)로서
우리는 슬립테크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인의 수면 시간과 워라밸 지수를 함께 놓고 보면 슬립 테크니 슬리포노믹스니 하는 말들도 조금은 달리 보인다.
잠은 우리 인생과 건강에 있어 정말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잠을 마음 놓고 잘 수도 없는 상황, 어쩌면 이 상황에 대한 플라시보(placebo, 위약)로서 우리는 슬립테크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3인분 같은 2인분의 고기를 주문하듯, 8시간 잔 것 같은 4시간의 잠을 슬립테크에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이 부족하다면 먼저 피곤이 풀릴 때까지 잠을 자는 데서 해결책을 찾는 게 순서다. 기술의 힘을 빌려 잠을 보충한다 치자. 그렇게 절감한 시간을 우리는 무엇에 쓰게 될까? 일일 까, 인생일까, 돈일까, 가족일까? 누군가에게 슬립테크는 워라밸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더 강도 높은 노동을 안겨줄 지도 모를 일이다.

2020년 새해에는 부자 되시라는 말을 하기보다 잠을 푹 주무시라 권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 나의 잠이 충분하다면 혹시 누군가 나 대신 잠을 줄여가며 위험을 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와 잠을 나눌 수는 없는 것인지 생각해보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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