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주는 위안이 새삼 고맙게 여겨질 때가 있다. 일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아름다운 자연과 벗하는 순간이다.
정선과 태백, 영월이 맞닥뜨린 지점에 ‘하늘정원’이라 부르기 딱 좋은 고갯마루가 있다. 해발 1,330m 높이에 자리한 함백산 만항재다.
차를 타고 편하게 갈 수 있으니 부담스럽지 않다.
글 사진 임운석(여행작가)
지천에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만항재, 천상의 화원에 오르다
만항재는 차를 타고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고개다. 해발 1,330m에 자리한 이 고개는 남한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함백산(1,573m)의 턱밑이다. 높은 곳인 만큼 찾아가는 길이 예
사롭지 않다. 이리저리 휘감아 도는 구절양장(九折羊腸) 같은 길을 운전하다 보면 드라이브의 묘미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특히 U턴을 하듯 휘감아 도는 구간에서는 혀를 내두를 것이다. 운전 맛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정선군 고한면에서 태백시 혈동을 잇는 구간을 달려보자. 돌고, 돌고, 또 돌아야 한다. 누가 그랬다. 이 구간을 운전하다 보면 ‘하늘 아래 첫 고갯길’임을 실감할 것이라고.
길이 험한 만큼 속도를 최대한 낮출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더더욱 좋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어서다. 하늘 높이 쭉쭉 뻗은 낙엽송들의 위용이 대단하다. 한결같이 올곧게 자랐다. 겨울에는 눈꽃과 상고대가 절경을 이루는데 이국적인 멋을 자아낸다.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인 고한면 끝자락에 다다르면 만항재다. 이후부터는 도로가 태백시 혈동을 향해 급격하게 휘감으며 내달린다. 하늘과 맞닿은 높은 지대인 데다 워낙 청정한 곳이어서 밤에는 별이 쏟아진다고 한다. 또 새벽녘에는 운무가 산을 휘감은 채 바람에 휘날려 신비롭기 그지없다. 칠흑 같은 밤이나 새벽에 차를 몰고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항재의 참모습을 보려면 차에서 내려야 한다. 그리고 숲길로 발을 들여야 한다. 만항재에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를 보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이곳을 ‘천상화원’이라 부르는지 이유를 알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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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만항재는 숲이 깊어 걷기에 제격이다.
풀꽃, 그만의 그윽한 향에 빠지다
고갯마루에 ‘백두대간 만항재’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을 바라보고 서면 오른쪽이 ‘하늘숲 공원’이고 왼쪽이 ‘천상의 화원’이다. 두 곳 모두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으니 어느 쪽을 먼저 선택해도 좋다. 대부분 하늘숲 공원을 먼저 돌아보는데 공원 앞이 탁 트여 있어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숲 정원보다 천상의 화원 면적이 더 넓다.
하늘숲 공원 안으로 발길을 들이면 지천으로 깔리다시피 핀 야생화가 관람객을 반긴다. 이름도 알쏭달쏭한 난생처음 보는 꽃이지만 어느 것 하나 곱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되어 숲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만항재에 피는 꽃을 담은 사진과 이름, 개화 시기, 꽃말 등을 적어놓은 팻말이 있다. 이름이라도 알면 좋겠다 싶었는데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준다. 얼레지, 홀아비바람꽃, 홀아비꽃대, 천마괭이눈, 회리바람꽃, 제비꽃 등 죄다 우리말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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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하늘숲 정원은 자연친화적으로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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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홀아비바람꽃이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풍력발전기, 거인이 꽂아 놓은 바람개비
하늘숲 공원을 빠져나와 천상의 화원에 들어선다. 이전에 느꼈던 기분과 다른 기분이다. 우선 산비탈을 따라 물이 흐르듯 산책로가 이어진다. 산책로 양옆에는 키 큰 낙엽송이 우후죽순 같은 기세로 하늘 높이 솟았다. 산책로는 비탈에 조성되어서 올곧지 않다. 걷기에는 이런 길이 더 좋다. 걷는 맛이 있달까. 앞선 하늘숲 공원에서 발아래를 보고 걸었다면 이곳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걸어볼 일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바쁜 일상을 탓하며 가까운 곳도 높은 곳도 그리고 먼 곳도 보지 않은 채 앞사람 뒤통수만 졸졸 따라다니며 사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 잠긴다. 하지만 이런저런 상념들이 자연이 주는 위안 덕에 스멀스멀 꽁무니를 감추며 사라진다.
숲길 너머 먼 곳에 시선이 멈춘다. 키 큰 나무보다 더 키가 큰 풍력발전기가 거인이 꽂아 놓은 바람개비처럼 서서 돌아간다. 한두 개가 아니다. 여기저기서 위세 당당하게 바람을 맞고섰다. 한국남부발전이 만항재에 구축한 32.2MW 풍력발전단지로 2.3MW 풍력터빈 14기로 구성됐다. 연간 2만 2,000가구가 이용 가능한 7만 8,000MWh의 무공해 전력을 생산한다. 고산 준봉이 발아래서 파도처럼 물결치는 만항재와 어우러진 풍력발전기는 그 모습 자체만으로 새로운 풍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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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한국남부발전이 만항재에 구축한 정암풍력발전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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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고한면 야생화마을에서 풍력발전단지가 보인다.
만항재가 끝이 아닌 정선의 명소들
이제까지 야생화의 매력에 정신이 혼미했다면 다시 차를 타고 고한면 쪽으로 달려보자. 만항재에서 5km 남짓 달리면 정암사에 닿는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으며, 국내 5대 적멸보궁 사찰이다. 적멸보궁이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법당을 일컫는다. 석가의 진신사리는 수마노탑(보물 제410호)에 봉안되어 있다. 따라서 법당에는 불상이 없다. 수마노탑까지 오르는 길은 가팔라 숨이 턱밑에까지 다다른다. 그런데도 최근 수마노탑이 국보로 승격을 앞두고 있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과거 정선, 태백, 영월에서는 집에서 키우는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석탄산업이 호황이었다. 하지만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인해 탄광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광부들도 하나둘씩 떠나갔다. 이후 폐탄광이 늘어나면서 흉물로 변했다. 정암사에서 고한면 방향으로 1km정도 떨어진 삼탄아트마인 역시 폐탄광이었는데 2013년 문화예술뮤지엄으로 부활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 인기를 끌었으며, ‘대한민국 공공 디자인 대상’(2013년) 수상,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00선’ 등재(2015년), 문화체육관광부 ‘열린관광지’ 선정(2017년), 한국관광공사 테마 10선에 지정(2019년)된 명소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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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정암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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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그림에서 광부의 삶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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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정선 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곤드레 나물밥.
Travel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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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팁
정선엔 먹거리가 풍성하다.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이름 붙여진 곤드레나물을 비롯해 각종 산나물이 유명하다. 또 정선 5일장에 가면 ‘후루룩’ 빨리 먹다가 콧등을 쳤다는 콧등치기 국수, 올챙이를 꼭 닮은 올챙이국수, 구수한 메밀 전과 수수부꾸미 등을 맛볼 수 있다.
내비게이션 정보
▷만항재(강원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산215) ▷정암사(강원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10) ▷삼탄아트마인(강원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45-44)
문의
정선군종합관광안내소 1544-9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