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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짜 원해야 할 게
기계적 공정함일까?

2010년 6월 13일, 미국 메이저리그의 투수 아만도 갈라라가는 9회 말 2아웃까지 상대 타자들을 모조리 아웃시키며 퍼펙트게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27번째 타자가 친 땅볼도 타자보다 한걸음 먼저 1루에 전달됐다. 모든 관중이 환호한 그 순간, 1루심은 힘차게 양팔을 벌리며 세이프를 선언했다. 로봇 심판 도입 논의를 촉발한 역대급 오심이었다.

박종훈(칼럼니스트)


경기 후 1루심 짐 조이스는 오심이었음을 인정하고 눈물까지 비치며 투수에게 사과했다. 이후 오바마 대통령까지 나서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퍼펙트게임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불문율이 굳건한 야구계에서 기록 번복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여느 오심들처럼 해프닝으로 끝내기에는 비판의 여론이 너무 거셌기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결국 재발 방지책 마련에 나서게 된다. 수년간의 준비 끝에 메이저리그는 2014년 시즌부터 ‘비디오 판독’을 도입했다. 심판 판정 결과에 대해 챌린지를 신청하면, 판독 센터에서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분석한 후 결과를 번복할 수 있게 했다.

오심 방지를 위한 메이저리그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다 근본적이며 어쩌면 150년 야구 역사에서 가장 논쟁이 될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2019년 8월 28일 벌어진 미국 독립리그의 한 야구 경기에 전 세계 미디어의 관심이 집중됐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수년간 개발한 ‘로봇 심판’ 혹은 ‘AI(인공지능) 심판’이 실전 적용된 첫 번째 경기였기 때문이다.

로봇 심판이라고 해서 휴머노이드(사람 형상 로봇)가 심판의 자리를 꿰찬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자동 볼-스트라이크 시스템(Automated Ball-Strike System, ABS)’이 판정한 것을 심판에게 무선으로 전달하면, 심판이 그대로 콜을 하는 방식이었다. ABS의 기능이 한 가지뿐임에도 로봇 심판이란 타이틀이 붙은 이유는, 비디오 판독 신청의 대상에서도 제외된, 즉 절대 번복할 길이 없는 심판 고유의 권한인 ‘스트라이크-볼’의 판정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ABS가 적용된 첫 야구 중계를 보도하는 기사의 헤드라인과 논조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판정 결과의 전달에 2초가량의 지연이 있어 어색하지만, 로봇 심판의 등장으로 조만간 ‘그라운드의 악당들’을 보지 않게 될 것 같다는 기대감과 낙관론이 주를 이뤘다.

기술은 악당을 몰아낼 것인가

미국의 전설적 야구 기자 레너드 코펫이 저술한 「야구란 무엇인가」의 ‘심판원’ 챕터는 ‘자, 이제 악당을 등장시킬 차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코펫은 거대 규모의 야구산업과 수천만 달러를 받는 선수들의 플레이가 고작 연봉 수만 달러의 심판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의 위험성과 부당함을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코펫은 책의 후반부에서 심판의 스트라이크-볼 판정을 기계로 대체하려는 시도와 기술적 한계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는데, 「야구란 무엇인가」의 출간연도가 1967년임을 감안하면 악당들에 대한 불신과 분노의 역사는 유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영화 「더 팬」(1996년 작)에서 악역 로버트 드 니로가 심판으로 위장한 장면도 어쩌면 괜히 나온 게 아닐 것이다.

로봇 심판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기술의 발전 덕이다. 메이저리그에는 2006년에 여러 대의 카메라를 이용해 투구를 시속 1마일과 1인치 내외의 정확도로 추적하는 ‘피치 에프엑스(Pitch f/x)’ 시스템이 도입됐다. 이미 2015년에 피치 에프엑스가 실제 시합에서 심판 대신 스트라이크 판정을 하게 하는 실험을 한 적도 있다.
‘ 기계적 공정성’ 의
대가로 우리가 알고
즐기던 야구를 포기
해야 한다면, 그래도
우리는 공정함만을
요구해야 할까?
Robot-Umpire_출처-Bold Business
2019년에 선보인 로봇 심판은 ‘트랙맨(Trackman)’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트랙맨은 원래 군사용 기술로 음파를 이용한 도플러 레이더 시스템이다. 일반적으로 카메라 등 광학 추적 방식보다 정확도가 더 높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작년의 로봇 심판 실험 결과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됐고, 올해 메이저리그는 트랙맨이 아닌 ‘호크아이(Hawkeye)’를 이용한 로봇 심판을 테스트하고 있다. 호크아이는 레이더가 아닌 카메라를 활용한 광학 추적 방식인데, 피치 에프엑스의 카메라 방식보다 진일보한 것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도 메이저리그보다 약 1년 늦은 2020년 8월 4일, 2군 경기인 퓨처스리그에서 로봇 심판의 실험을 시작했다. 올해 26경기에서 로봇심판을 시범 운영한 후 단계별 확대를 계획하고 있다. KBO는 레이더 트래킹 기술 업체와 협력해 메이저리그와는 다른 독자적인 ‘자동 볼-스트라이크 판정 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도대체 스트라이크란 무엇인가

이쯤 되면 조만간 일자리를 빼앗긴 악당들이 로봇 심판에 물리력을 행사하는 야구판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을 머릿속에 그려 볼 수도 있겠으나, 상황은 외려 정반대다. 심판들은 로봇의 스트라이크-볼 판정을 전달만 하는 역할에 긍정적 입장이다. 메이저리그의 로봇 심판 실험도 심판 노조가 적극 협력한다는 계약 하에 진행되고 있다.

왜 그런 걸까? 한 경기에서만도 팬들로부터 수십 번의 욕을 먹어야 할 만큼 스트라이크-볼 판정은 매우 어려운, 무엇보다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의 스트라이크 존 규정은 비슷한데 대략 다음과 같다. “타자 유니폼의 어깨 윗부분과 바지 윗부분의 중간쯤 되는 수평선을 상한선으로 하고, 무릎 아랫부분을 하한선으로 하는 홈 베이스의 상공을 말한다.”

즉, 가로 17인치(43.18cm), 세로 8.5인치(21.59cm), 높이는 타자의 키에 따라 달라지는 허공 속 ‘가상의 직육면체 공간’을 스쳐 지나는 공이 스트라이크가 된다. 달리 말하면, 시속 150km를 웃도는 직구나 휘거나 떨어지는 변화구가 타자마다 달라지는 가상의 입방체 영역을 조금이라도 통과했는지를 한 경기에 약 250번 판단하는 것이 야구 심판의 일인 것이다.

모든 구기 종목은 선과 면을 기준으로 플레이가 이뤄진다. 가령 축구는 골대라는 물체로 규정된 직사각형의 면을 통과하면 골로 인정한다. 야구도 기본적으로 선의 규정을 받지만 유독 스트라이크 규정만은 입방체,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입방체를 기준으로 한다. 타자는 자신만의 가상의 입방체가 있다. 이것이 심판의 입방체와 어긋나게 되면 오심 논란이 벌어지게 되고 팬들은 비난과 야유를 보내게 된다.

어떤가? 심판들이 로봇의 등장에 반감을 표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은가? 이 애매모호하며 욕먹기 딱 좋은 판정 작업을, 혹여 하나라도 실수할까 3시간 넘게 집중해야만 하는 일을 사실은 심판들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로봇 심판이 도입되면 스트라이크-볼 판정 논란이 없어지기보다 더 소란스러워질 것이라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이유는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스트라이크 존은 규정을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치며 심판-선수-팬 사이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것이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존_출처-야구공작소

AI와 공존 혹은 AI에 떠넘기기

로봇 심판의 볼 판정에 대한 심판들의 평가 중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거의 정확하지만 종종 크게 벗어난 공을 스트라이크로 판정’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어쩌면 로봇이 맞고 사람이 틀린 것은 아닐까? 규정에는 가상의 입방체를 통과하면 스트라이크라 돼 있지만, 실제 야구는 그렇지 않다. 존을 통과한 후 급격히 떨어지거나 휜 공은 볼로 판정되고, 가슴 높이로 통과한 공도 규정과 달리 볼이 된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야구다.

로봇 심판이 도입되면 아마도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타자들과 팬들은 더 많이 항의하게 될 것이며, AI를 통한 승부 조작 음모론을 펴게 될 것이다. 이런 혼란을 피하려면 인공지능에 ‘규정과 달리 이런 공은 스트라이크로 판정하면 안 된다’라는 ‘모순과 불합리’를 학습시켜야 할 터인데, 과연 그렇게까지 하면서 로봇에게 판정을 맡겨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실수이든 고의이든 잘못된 스트라이크-볼 판정은 매 경기 나온다. 때론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오심도 있다. 이미 승패가 기운 경기라면, 주심은 지고 있는 팀에 판정을 후하게 준다. 얼른 경기를 마치는 것이 매일 뛰어야 하는 선수들이나 이미 긴장감이 떨어진 팬들에게도 좋기 때문이다.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눈앞에 둔 이승엽 선수가 만일 마지막 타석에 투 스트라이크로 몰린 상황이라면, 존에 살짝 걸치는 세 번째 스트라이크가 들어온다 해도 심판은 삼진을 선언하기 쉽지 않다. 대기록의 기회가 배트를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무산되는 것을 누구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야구를 즐기고 있는 방식이며, 어쩌면 우리 추억 속 수많은 명장면의 일부는 오심 덕에 가능했을 것이다.

야구에서 로봇 심판을 도입하려는 것은 오심을 없애고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AI는 아마도 규정대로 공정하게 판정을 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그 ‘기계적 공정성’의 대가로 우리가 알고 즐기던 야구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래도 우리는 공정함만을 요구해야 할까?

어차피 앞으로 인간은 AI와 공존하며 일해야 하고, 점차 인간의 일 대부분은 AI 로봇이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응당 사람들이 합의와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내려야 할 판단의 책임마저 ‘기계적 공정성’이나 ‘속 편함’을 이유로 AI에게 떠넘겨 버린다면, AI는 언젠가 이 생각 없는 인간들을 그냥 지배하는 게 낫겠다고 마음먹게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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