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폭염이 물러난 자리에 가을이 제 먼저 알고 들어섰다. 싱그럽던 초록이 하루가 다르게 단풍으로 알록달록 물들고 선선해진 바람이 어디로든 데려다줄 것 같은 이맘때.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놓치지 말고 누려야 할 것들이 있다. 밀양 재약산 사자평 억새 물결도 그중 하나. 고산지대에 넓게 자리한 습지에 꽉 들어찬 은빛 억새는 선걸음에 달려온 가을의 선물 같다.
그린 트래블 | 글 이은정 기자 사진 밀양시청(www.miryang.go.kr) 제공
경상남도 밀양 단장면과 울산 울주군에 걸쳐 있는 재약산은 산세가 수려해 삼남(三南)의 금강산(金剛山), 이른바 삼남금강(三南金剛)으로 불린다. 사계절 어느 때나 아름답지만 그중 단풍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가을 풍경은 견줄 데가 없다. 특히 인근 천황산과 신불산, 취서산으로 이어지는 은빛 억새 능선은 가을이 오는 이즈음부터 만날 수 있는 선물과 같다. 재약산 남동쪽 8부 능선부터 정상인 수미봉까지 넓게 자리 잡은 사자평은 전국에서 가장 넓은 억새 평원으로 꼽힌다. 넓이가 58만㎡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산지 습지로, 예전에 살던 화전민들이 평지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은빛 물결 가득한 억새 터로 변했다. 사자평이라는 명칭도 워낙 높고 넓은 곳이라 ‘백수의 제왕 사자의 영토’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가을의 전령인 억새는 단풍과 또 다른 느낌으로 가을의 정취를 풍긴다.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휩쓸리되 결코 꺾이지 않는 유연함을 자랑하는 억새의 흔들림은 은빛 물결이 되어 흐르고 또 흐른다. 높은 산 중턱에 자리한 탁 트인 평원에서 만나는 은빛 억새의 군무는 그 자체로 장관이다.
그뿐만 아니다. 사자평에는 억새 외에 매와 삵, 하늘다람쥐 등과 달뿌리풀, 참비녀골풀 등 450종이 넘는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가을 야생화 탐방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행운이 따른다면 2012년부터 이곳에 방사한 멸종 위기종 은줄팔랑나비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재약산은 유럽 알프스에 비해 규모만 작을 뿐 수려한 산세와 풍경은 이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영남 알프스의 하나다. 재약산을 비롯해 낙동강을 따라 자리 잡은 가지산, 신불산, 천황산, 운문산, 간월산, 취서산, 고헌산, 문복산 등 해발 1000m 고봉이 영남 알프스에 속한다. 여유가 있다면 재약산과 사자평 외에 영남 알프스로 꼽히는 산들까지 느긋하게 둘러보길 추천한다.
재약산 남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부처님을 모시는 것 외에 유생을 교육하고 성현들을 제사하는 표충서원이 사찰 안에 함께 있어 불교와 유교가 한자리에 공존하는 특색 있는 천년 고찰로 꼽힌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에 원효대사가 죽림사로 창건했고, 신라 흥덕왕 때 왕자의 병을 완치시킨 것을 고마워하며 왕사로 격상시켜 영정사로 바꿔 불렀다. 이후에도 몇 번이나 명칭이 바뀌었다가 1839년에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를 모신 표충사당을 이곳으로 이건한 것을 계기로 지금의 표충사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더해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대선사가 1966년 열반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엔 찬찬히 살펴볼 만한 문화재가 많다. 1177년에 제작돼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시대 향로인 표충사 청동함은향완(국보 제75호) 외에 보물 제467호인 3층 석탑, 사명대사의 유물 20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널찍한 마당에 서서 대광전, 서래각, 표충서원까지 둘러보고 3층 석탑 뒤편으로 영각과 응진전까지 보면 마음이 절로 평안해진다. 또 영각과 응진전 앞에 배롱나무 4그루가 있는데, 흔히 백일홍으로 불리는 이 나무들이 화사하게 꽃을 피우면 선명한 붉은빛이 사찰과 어우러져 묘한 정취를 풍긴다.
표충사에서는 하루 동안의 템플 라이프나 휴식형·체험형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으므로 가족이 함께 혹은 혼자라도 느긋하게 사찰의 고즈넉함을 만끽해보길 권한다.
위치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
문의 종무소(055-352-1150)
얼음골은 재약산 정상을 기준으로 표충사와 반대 지점인 북쪽 중턱에 있는 계곡이다. 산비탈을 따라 3만㎡ 정도에 수많은 돌이 무더기로 흩어져 있는 너덜겅이 널찍하게 펼쳐져 있는데, 그 돌무더기 틈으로 계절을 역행해 여름에는 냉기가, 겨울에는 더운 김이 피어오른다. 대개 3월 초순부터 8월까지 바위 사이로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가 장마철이 지나면 고드름이 녹고, 한여름에도 냉기가 흘러 에어컨을 켠 것처럼 시원한 바람이 일품이다. 반대로 겨울에는 계곡물이 얼지 않고 오히려 더운 김이 올라온다. 아이러니하게도 더위가 심할수록 얼음이 더 꽁꽁 얼어붙는다. 유난히 폭염이 길었던 올해는 10여 년 관측 이래 얼음이 가장 오랫동안 관측됐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한 설명이나 근거는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으나 밀양의 신비로 불리며 천연기념물 224호로 지정됐다.
얼음골까지 왔다면 케이블카를 타고 영남 알프스 절경을 한눈에 감상해도 좋다. 밀양시 산내면 삼양리 구연마을에서 진참골 계곡까지 1.8㎞나 이어진 국내 최장 케이블카다. 해발 1000m가 넘는 10개가량의 큰 봉우리와 해발 800m 안팎의 중간 봉우리들을 동시에 감상하며 발아래로 펼쳐진 재약산 사자평 억새밭 장관을 만끽할 수 있어 좋다. 또 케이블카 상부 승강장에서 약 280m에 걸쳐 이어져 있는 데크로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주변 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날이 맑으면 단풍으로 곱게 물든 영남 알프스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고 날이 흐리면 또 그대로 최고의 운무를 만날 수 있어 좋다.
위치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산95-1, 2번지(결빙지)
문의 얼음골관리사무소(055-356-5640)
얼음골에서 3km쯤 떨어진 곳에 호박소가 있다. 가지산 물줄기의 하나로 백옥 같은 화강암이 수십만 년 동안 물에 씻겨 커다란 소(沼)를 이룬 곳이다. 오랜 세월 속에 자연이 빚은 걸작인 셈이다. 이름만 들으면 채소 호박을 상상하기 쉬우나, 이 호박은 절구 입구부터 밑바닥까지의 구멍을 의미하는 ‘확’의 경상도 사투리다. 오랜 세월에 걸쳐 폭포수가 떨어지며 파인 자리가 흡사 확과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시례’ 또한 가지산의 또 다른 명칭인 실혜산에서 유래한 실혜가 나중에 바뀐 것이라고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호박소는 오랜 가뭄이 이어질 때 기우제를 지내던 영험한 기우소였다. 규모도 결코 작지 않다. 폭포 높이는 10m, 둘레는 30m가 넘는다. 깊이도 상당하다. 명주실 한 타래가 다 들어갈 만큼 깊었다는 옛이야기가 있지만 실제 수심은 6m가 넘는다. 무엇보다 한여름에도 물이 차가워 발을 오래 담그고 있기가 힘들 정도다. 하얀 화강암과 10m 높이에서 거침없이 떨어지는 폭포수, 그 폭포수가 가닿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옥빛의 소, 그 소를 둘러싼 아름다운 주변 경관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재약산에 들렀다면 놓칠 수 없는 풍경이다.
위치 경남 밀양시 산내면 얼음골로 334-1
문의 산림녹지과(055-359-5361)
유불이 공존하는 재약산 중심의 사자평은 문화와 생태의 보고같습니다.
황홀한 단풍을 따라 영남 알프스를 산행하면서 도시에서 찌든 찌꺼기를
맑큼하게 씻고 싶습니다. 2019년에는 얼음골에서 산행의 땀도 들이고
호박소에서는 발도 쉬면서 절경을 한 번더 느껴 보겠습니다.
좋은 곳을 소개해 주신 편집자 여러분들과 한국남동발전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