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여행

옛 소련 추억, 붉은 광장을 거닐다

러시아 모스크바와 조지 오웰의 『1984』

드넓은 광장에서 한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이름은 윈스턴 스미스. 직장에서 알게 된 줄리아와 광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얼마 후 그녀의 모습이 눈에 띄었지만 바로 다가가 말을 걸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못 본 척 딴짓을 하다가 군중 속에 파묻힌 후에야 가까이 다가섰다. 얼굴을 마주 보지도 못한 채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광장 곳곳에 감시용 카메라인 텔레스크린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조차도 통제받는 감시사회.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옛 소련의 모습이다.
책+여행 | 글+사진 이준명 작가 인용 『1984』, 민음사, 2003

크렘린의 입구 역할을 하는 쿠타피야 탑

구소련의 영화를 간직한 붉은 광장

1917년 로마노프 왕조가 다스리던 제정 러시아가 ‘10월 혁명’으로 무너졌다. 혁명 정부는 이듬해 3월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기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매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세력으로 갈려 냉전체제에 돌입했고, 구소련과 미국은 양 진영의 우두머리가 되어 대립했다. 두 나라는 핵무기를 비롯한 군사력을 과시하며 상대방을 위협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특히 구소련에서는 노동절을 비롯한 기념일에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졌는데, 그 장소로 쓰인 곳이 모스크바의 중심에 자리한 붉은 광장(Red Square)이다.
붉은 광장은 남북 길이 500미터, 동서 폭 100미터에 이른다. 구소련이 자랑하는 탱크와 미사일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위용을 과시했었다. 광장의 네 면에는 이 나라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서쪽에는 모스크바의 기원인 크렘린의 붉은 성벽이 길게 이어진다. 남쪽에는 러시아 성당 건축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성 바실리 성당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북쪽에는 러시아의 역사를 간직한 국립역사박물관이 빨간 벽돌로 쌓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한다. 동쪽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국영백화점이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실로 러시아의 정치, 종교, 역사, 경제가 집약된 장소인 셈이다.
1991년 구소련이 무너지자 급속하게 개방개혁이 추진됐다. 연방이 해체되어 새롭게 러시아가 들어선 지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제 붉은 광장에서 자본주의 진영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구소련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광장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이 활보하고, 국영백화점에는 서양의 명품 브랜드가 즐비하다. 노천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현지인의 모습에는 자본주의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공산주의의 맹주로서 전 세계를 호령했던 구소련의 영화는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만 증명해줄 뿐이랄까.

러시아 성당 건축의 백미로 손꼽히는 성 바실리 성당

감시와 통제의 도시, 모스크바

『1984』에서 세계는 초강대국 3개로 나뉘어 전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인 오세아니아에서는 모든 것이 당(黨)의 통제를 받았다. 집 안에 설치된 텔레스크린을 통해 모든 일상이 감시되고, 거리에 숨겨진 마이크로폰을 통해 모든 소리가 감청된다.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날아다니며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정체를 숨긴 사상경찰이 도시 곳곳에 깔려 있다. 가정에서는 세뇌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부모가 수상한 행동을 하지 않는지 살피고, 직장에서는 얼굴 한번 잘못 찡그렸다가 불만세력으로 찍혀 끌려간다.
오웰이 『1984』를 출간한 1949년경 구소련의 모스크바가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구소련을 탄생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비밀경찰을 동원해 권력을 잡았다. 스탈린은 ‘강철의 사나이’라는 필명을 지녔을 정도로 냉혹한 남자였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적대세력은 물론이요 함께 혁명을 달성했던 동지들까지 가차 없이 제거했다. 그리고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시민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했다. 작은 꼬투리라도 잡히면 누구를 막론하고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스탈린이 집권한 30년 동안 숙청당한 사람만 수십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1984』 속 오세아니아를 능가하는, 죽음의 공포로 가득 찬 1인 독재사회였다.

러시아 황실과 정교회의 총본산인 우스펜스키 대성당

러시아 정치와 종교의 심장부, 크렘린

붉은 광장 서쪽에 있는 크렘린은 구소련의 지도자가 머물던 곳으로, 지금도 러시아 대통령의 거처가 자리하고 있다. 정치적 위상에 가려 간과하기 쉽지만, 크렘린은 러시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장소다. 크렘린은 원래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성채를 뜻한다. 1156년 이 자리에 목조로 된 요새를 쌓은 것이 모스크바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수많은 외침을 겪으며 보강과 확장을 거듭하여 16세기경 돌로 쌓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크렘린은 한 변의 길이가 700미터에 이르는 삼각형 모양인데, 성벽은 높이가 9~20미터, 두께가 4~6미터에 이른다. 게다가 성벽 위에는 높이 80미터에 이르는 첨탑과 망루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야말로 어떤 침입도 용납하지 않는 철옹성이랄까.
밖에서 본 크렘린은 군사용 요새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뜻밖의 광경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흰색 벽 위에 황금색 돔이 장식된 성당들로 둘러싸인 광장이다. 일명 ‘성당 광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러시아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다. 그중에서도 우스펜스키 대성당은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던 역사적인 장소다. 성당 내부는 벽, 천장, 기둥 할 것 없이 전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어 성스러운 분위기를 더한다. 단순한 외관과 대비되는 화려한 내부 모습에 관광객의 감탄이 쏟아진다. 게다가 출입구 양쪽에는 러시아정교회의 총대주교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묻혀 있다. 실로 러시아 황실과 정교회의 총본산이라 할 만하다.

러시아의 역사를 간직한 국립역사박물관
희대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묘

전체주의를 고발한 디스토피아 소설

감시와 통제로 점철된 사회를 그려낸 『1984』는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로 손꼽힌다. 오웰은 이 작품을 통해 당으로 대변되는 전체주의(全體主義)의 위험성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소설 속에서 사상경찰은 ‘권력의 속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1984』에서 전체주의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빅 브라더’는 정체가 베일에 싸인 권력자다. 뒤집어 생각하면 누구든 권력을 잡으면 빅 브라더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유사 이래 권력을 탐하는 인간은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해왔다. 따라서 우리가 권력에 대한 견제를 소홀히 하면 전체주의의 악령은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다. 구소련의 공포와 스탈린의 독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어둠이 찾아온 붉은 광장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답다. 조명을 받아 붉게 빛나는 광장 안을 사람들이 거닐며 자유를 만끽한다. 하지만 감시와 통제로 대변되는 전체주의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에 이보다 적당한 곳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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