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여행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대륙을 누비다

안데스산맥과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울퉁불퉁한 비포장길 위로 오토바이 한 대가 덜덜거리며 달려간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남자 둘이 오토바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꼭 붙들고 있다. 산길을 오르다 턱에 부딪힌 오토바이가 미끄러지며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지만 두 남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를 여행하겠다는 꿈이 가슴속에 가득했기에.
책+여행 | 글+사진 이준명 작가 인용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황매, 2004

만년설을 머리에 인 오소르노 화산

두 의학도의 충동적인 여행

1951년 10월 어느 날. 23살 청년 에르네스토 게바라(Ernesto Guevara)는 6살 손위인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의학도였던 두 사람은 빡빡한 학업 일정과 병원 일에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북아메리카에 가보면 어떨까?” “북아메리카에? 어떻게?” “포데로사를 타고!” 포데로사는 알베르토가 타고 다니는 500cc짜리 오토바이였다. 두 사람의 여행은 이렇게 충동적으로 결정됐다. 이듬해 1월 4일 두 사람을 실은 포데로사가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출발했다.
게바라 일행은 줄곧 서쪽으로 달려 안데스산맥 기슭에 있는 바릴로체에 도착했다. 바릴로체는 ‘남미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숲과 물이 어우러진 광활한 호수 지대로, 여름에는 피서객이, 겨울에는 스키어가 몰려드는 휴양도시이기도 하다. 1934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존돼왔으며, 스위스 이민자들이 조성한 마을에는 유럽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바릴로체의 풍광을 음미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캄파나리오 전망대’다. 전망대 위에 서면 360도 어딜 봐도 설산과 호수가 펼쳐진다. 흰 눈을 머리에 인 산들이 병풍처럼 늘어선 가운데, 아기자기한 호수들이 숲 사이에서 빛난다. 전망대에는 카페가 마련되어 있어서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경치 구경하기도 좋다.

나우엘우아피 호수 남쪽 기슭에 있는 바릴로체

오토바이 여행의 고단함

두 남자의 여행 계획이 무모한 객기에 지나지 않았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포데로사는 ‘힘센 녀석’이란 뜻이었지만 성인 남성 둘을 태우고 다니기에는 버거웠다. 툭하면 고장이 나서 수리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였다. 특히 포장도 되지 않은 산길을 오토바이로 달리는 건 고난의 연속이었다.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쉴 곳을 찾아야했다. 근처 농장까지 가려고 진흙길을 300미터나 올라갔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두 번이나 더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 … 우리는 처음으로 비포장도로를 경험한 충격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하루에 아홉 번의 사고라니! 우리는 포데로사의 옆에 침낭 – 이제부터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침대였다 – 으로 거처를 마련하고 달팽이처럼그 속에 누웠다. …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게바라 일행은 고생 끝에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 땅에 도착했다. 늘씬한 원추형의 자태를 뽐내는 화산이 이들을 반겨주었다. 높이 2,261미터를 자랑하는 오소르노 화산이었다. 지금도 왕성히 활동 중인 오소르노 화산 주변에는 만년설 녹은 물이 넘쳐흐르는 계곡과 호수가 널려 있다.

외계 행성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아타카마 사막

눈물 나도록 열악한 땅, 아타카마

칠레 최북단에는 세계 최대의 구리광산 중 하나인 추키카마타가 있다. 해발고도 3,000미터인 고원에 자리한 이 광산은 인간의 삶을 거부하는 열악한 땅이다. 게바라 일행은 길에서 광산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노동자 부부와 마주쳤다. 촛불 아래 보이는 그들의 주름진 얼굴에는 삶의 고단함이 새겨져 있었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석 달간 투옥된 남편, 늘 배를 곯으면서도 그런 남편을 성실히 따르는 아내, 고향의 이웃들에게 맡기고 온 아이들, 매번 거절당하면서도 일거리를 찾아 떠도는 삶. 가난한 부부는 고원의 혹독한 추위를 막아줄 담요 한 장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게바라 일행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동지들, 이리 오시오. 같이 먹읍시다. 나도 떠돌이요.”
게바라 일행이 방문했을 당시 추키카마타 광산은 미국계 기업이 소유하고 있었다. 기업은 칠레 노동자들에게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급여만 지급하며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었다. 고된 노동과 열악한 작업환경에 추위와 배고픔까지 더해지자 노동자들은 오래지 않아 쓰러져갔다.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한 게바라는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만일 위대한 영혼이 인류를 두 개의 적대적 진영으로 나눈다면 나는 민중과 함께할 것”이라고.
남미를 찾은 여행자 중에 추키카마타 광산을 방문하는 이는 드물다. 그래도 이 지역의 혹독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볼 수 있다. 광산 근처에 아타카마 사막이 있기 때문이다. 아타카마 사막은 세상에서 강수량이 가작 적은 지역으로 유명하다. 일 년 내내 비 한 번 내리지 않는 해도 있단다.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땅은 어떤 모습일까. 사막 위에 솟은 모래언덕을 오르니 아타카마의 풍경이 눈 아래 쫙 펼쳐졌다. 지형이 워낙 특이해서 외계 행성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저 멀리 안데스산맥에서부터 모래폭풍이 피어오르고, 황금빛 사막 여기저기에 눈 덮인 화산이 솟아 있었다. 모래언덕 위에 앉아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던 중 갑자기 눈물이 났다. 사막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사람들의 삶이 너무 고달파서.

여행이 만들어낸 혁명가, 체

게바라와 알베르토의 동행은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해 칠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까지 이어졌다. 베네수엘라에서 알베르토와 헤어진 게바라는 홀로 비행기를 타고 미국 마이애미에 들렀다가 8월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지만 첫 여행지인 칠레에서 고장 나는 바람에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걸어 다녔다. 게바라의 말처럼 ‘부랑자 모터사이클족’에서 ‘부랑자 도보여행자’로 바뀐 셈이었다.
그런데도 게바라 일행이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던 건 그들을 환대해준 현지인들 덕분이었다. 항상 여비가 부족해 잠은 경찰서나 병원 등에서 신세를 졌고, 식사는 주로 현지인의 초대를 받아 해결했다. 그래서일까. 게바라는 여행을 마친 후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모든 사람은 피를 나눈 형제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자신이 나아갈 길이 의학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고통받는 민중을 해방시킬 혁명의 길이었다.
3년 후 게바라는 멕시코에서 쿠바 반군의 우두머리인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 피델과 함께 쿠바로 건너가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내고 쿠바혁명을 이루어냈다. 어느덧 그에게는 ‘체 게바라’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 ‘체(Che)’는 친구 또는 동지를 의미하는 단어다. 게바라를 민중의 친구인 체로 만든 것은 오토바이를 타고 떠났던 남미여행이었다.

안데스산맥에서 불어오는 모래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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