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여행

알프스를 걸으며 사색하는 즐거움

스위스 몬타뇰라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알프스의 산자락.
큰 키에 비쩍 마른 남자가 멀리서 걸어왔다.
나이는 마흔 살쯤 먹었을까.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다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호수에 눈길을 빼앗겨버린 것. 한동안 경치에 빠져 있더니 근처의 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그의 이름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얼마 전 집을 나와 세상을 떠도는 중이었다.
책+여행 | 글+사진 이준명 작가

산골로 숨어든 유명 작가

헤세가 여장을 풀기로 마음먹은 곳은 ‘몬타뇰라(Montagnola)’라는 산골마을이었다. 거처를 물색하던 헤세의 눈에 커다란 저택이 들어왔다. 19세기에 지어진 저택의 이름은 ‘카사 카무치’. 겉모습은 화려했지만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내부는 엉망이었다. 저택을 둘러본 헤세가 ‘고귀한 폐허’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헤세는 저택에 딸린 작은 건물 하나를 빌렸다.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당시 헤세는 심각한 정신적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부럽지 않은 삶이었다. 문단에서는 인정받는 중견 작가였고, 가정에서는 아내와 세 아들을 둔 가장이었다. 가족과 단란한 생활을 보내며 소설 집필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헤세는 가끔 원인 모를 불안과 분노에 휩싸였다. 이럴 때면 말도 없이 집을 뛰쳐나가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불안정한 정신 상태에 치명타를 가했다. 독일의 군국주의에 반대했다가 ‘배신자’라며 손가락질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헤세는 제 발로 정신병원을 찾아갔다.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존마트 사설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까닭 모를 방랑의 원인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헤르만 헤세 박물관 입구
『데미안』 초판 표지(1919년)

알을 깨고 나오려는 몸부림

헤세가 쓴 『데미안(Demian)』은 싱클레어라는 젊은이가 주인공이다. 싱클레어는 기독교 사회에서 ‘선한 세계’로 여겨지는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악당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이 세상이 ‘선’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동급생인 데미안이 나타나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었다.
사회적 통념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으로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 헤세는 어려서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원하지도 않는 신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는 학교 기숙사에서 탈출, 정신병원 입원, 권총 자살 시도였다. 자신의 판단과 감정에 충실하지 않은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다.
싱클레어도 선악이 뒤섞인 세상에서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데미안이 보낸 쪽지를 받았다. “새는 알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친다. 그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헤세도 알을 깨고 나오려는 작은 새였다. 아들을 신학자로 만들려는 부모의 희망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헤세를 짓눌러왔다. 헤세는 자신을 둘러싼 정신적 억압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집을 나와 몬타뇰라에 정착한 것은 알을 깨고 나오려는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취미인 그림 그리기에 빠져 있는 헤세
헤세가 그린 알록달록한
몬타뇰라 풍경

몬타뇰라에서의 한적한 전원생활

몬타뇰라는 스위스 티치노주에 속한 마을이다. 알프스산맥 남쪽 자락인 티치노주는 스위스의 여느 지역과 분위기가 좀 다르다.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스위스 속의 이탈리아’라고 불리는 고장이다. 집들도 이탈리아풍이고 날씨도 훨씬 온화하다. 봄이면 지중해에서 불어온 따뜻한 바람이 코끝을 간질인다. 아름다운 알프스를 바라보며 전원생활을 만끽하기 좋은 장소랄까.
몬타뇰라에 가려면 루가노라는 도시에서 기차를 내려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버스 편도 많지 않아 한 시간에 한두 대 정도다. 헤세가 살던 집은 현재 ‘헤르만 헤세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싱긋이 웃는 헤세의 사진이 건물 입구에서 방문객을 맞는다.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2층 발코니 앞에는 책상이 있고 그 위에 헤세가 작품을 집필할 때 사용한 낡은 타자기가 놓여 있다. 헤세는 책상에서 글을 쓰다 피곤해지면 집 밖으로 산책을 나섰다. 눈앞에 펼쳐진 알프스의 산과 호수가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몬타뇰라에는 헤세가 걷던 산책로가 남아 있다. 박물관을 나와 걷다 보면 언덕 위에 놓인 빨간 벤치가 눈에 들어온다. 눈앞에는 알프스의 산들을 배경으로 루가노 호수가 펼쳐진다. 알프스라고는 하지만 하얀 만년설도, 뾰족한 봉우리도 없다. 부드러운 곡선의 낮은 산들이 겹쳐지고, 그 사이를 맑은 호수물이 채우고 있다. 편안한 복장에 모자를 눌러쓴 헤세의 배낭에는 항상 그림 도구와 적포도주 한 병이 들어 있었다. 그림은 정신 치료의 일환으로 마흔이 넘어 시작한 취미였지만 꽤 소질이 있었다. 헤세는 그림의 효과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림 그리기는 환상적이다.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인내심을 길러준다. 글을 쓰고 나면 손가락이 검게 변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나면 붉고 파랗게 물든다.”

헤세가 사용했던 책상과 타자기
헤세가 몬타뇰라에서 머문 카사 카무치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라!

헤세는 우연히 방문한 몬타뇰라에서 43년 동안 살았다. 이렇게 오래 머문 이유는 도시의 번잡함을 피할 수 있는 산골이었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헤세는 항상 혼자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헤세가 유명해질수록 상황은 악화됐다. 특히 1946년에 수상한 노벨문학상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일흔 살의 노작가를 ‘몬타뇰라의 현자’라고 칭송하며 전 세계에서 방문객이 몰려왔다. 여름철이면 헤세를 찾아온 방문객이 마을에 장사진을 쳤다. 헤세가 몬타뇰라에서 누려온 한적한 생활이 끝장나고 말았다.
헤세를 괴롭힌 건 방문객뿐만이 아니었다. 인생이 무엇인지 묻는 편지가 매일 산더미처럼 날아들었다. 시력이 나빠진 헤세는 편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류머티즘이 악화돼 손에 필기도구를 쥘 수도 없었다. 그래도 헤세는 힘닿는 한 답장을 보냈다. 헤세는 누군가를 인생의 교사로 여기며 가르침을 구하는 태도를 경계했다. “자기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강화하지는 않고, 기꺼이 한 작가, 한 스승, 하나의 가르침에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자는 책이나 작가 없이는 자신의 주인, 고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답장을 보낼 때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고집스럽게 그 목소리를 따르라’고 말이다. 이것이 몬타뇰라의 현자가 알프스 산자락을 걸으며 발견한 인생의 나침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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