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여행

불심을 품은 이들이 사는 땅

티베트 라싸와 하인리히 하러의 『티베트에서의 7년』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티베트고원. 해발고도가 4,000미터를 넘나드는 불모의 땅을 두 남자가 터벅터벅 걸어간다. 네팔에서 국경을 넘어 티베트의 수도 라싸로 향하는 중이다. 한겨울의 추위를 뚫고 1,0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걸어왔다. 이들은 왜 목숨을 걸고 티베트고원을 횡단했을까?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 1912~2006)가 쓴 『티베트에서의 7년』에서 이유를 알아보자.
책+여행 | 글+사진 이준명 작가 인용 『티베트에서의 7년』 수문출판사·1989

영국에서 번역 출판된 『티베트에서의 7년』

금단의 땅으로 도망친 전쟁 포로

하러는 산악계에 이름을 떨친 등반가다. 1938년 알프스의 봉우리 중 인간의 발길을 허락지 않던 아이거 북벽을 세계 최초로 정복했다. 수많은 등반가의 목숨을 앗아간 높이 1,800미터 수직 절벽을 기어올라 이룩한 쾌거였다. 산악계에서 입지를 다진 하러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눈길을 돌렸다. 8,000미터대 고봉들이 늘어선 히말라야 원정은 모든 등반가의 꿈이나 다름없었다. 1939년 독일의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참여한 하러가 본격적인 등반을 앞두었을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인도에 주둔한 영국군에 체포된 것이다.
포로수용소로 이송된 하러의 머릿속에는 ‘탈출’이란 두 글자밖에 없었다. 현지어를 배우고 아시아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차근차근 준비를 갖췄다. 결국 세 번째 시도 만에 탈출에 성공해 1944년 5월 티베트 국경에 도달했다. 하지만 당시 티베트는 외국인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는 금단의 땅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하러는 동료 5명과 함께 몰래 국경을 넘었다. 밀입국자 신세였기에 라싸로 가는 내내 추방하겠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정부에서 발행한 여행허가증이 없어 식량을 구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동료 3명은 라싸행을 포기하고 떨어져나갔다. 하러는 원정대 대장이었던 아우프슈나이터와 함께 눈 덮인 고원을 끝까지 횡단했다. 갖은 고생 끝에 라싸 근처에 도착한 순간 감격을 억누를 수 없었다.

참배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조캉사원
티베트의 상징이자 자랑인 포탈라 궁

끝없는 신앙심의 표현, 오체투지

티베트는 지금도 여행하기 까다로운 곳이다. 물론 하러처럼 걸어서 고원을 횡단하는 고생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비행기나 기차로 편안히 라싸까지 갈 수 있다. 문제는 정치적 상황이다.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하여 현재까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인을 감시하기 위해 중국 경찰인 공안이 거리마다 깔려 있다. 외국인의 여행도 자유롭지 않아 비자와 별도로 특별한 여행허가서가 있어야 한다. 그래도 수많은 여행자가 수고를 마다하지않고 라싸를 찾는다. 불교를 숭상하는 티베트인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분위기를 음미하기 위해서다.
라싸에 아침이 찾아오면 거리에 참배자의 행렬이 이어진다. 손에는 ‘마니차’라고 부르는 물건을 하나씩 들고 있다. 짧은 막대기 위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통이 달려 있다. 옛 티베트 문자는 매우 어려워서 서민들은 불경을 읽을 수 없었다. 이에 긴 두루마리로 된 불경을 원통 속에 돌돌 말아 넣은 다음, 통을 한 바퀴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은 것으로 쳐주었다. 그 덕분에 길을 가면서도 마니차를 돌리며 공덕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참배자 행렬을 따라가 보니 향 연기가 자욱한 광장이 나타났다. 벽에 수많은 부처님이 그려져 있어 ‘천불절벽’이라 불리는 곳이다. 광장을 가득 메운 참배자들이 벽을 향해 끊임없이 절을 올렸다.
그런데 절하는 방법이 좀 특이하다. 허리를 숙인 후 몸을 앞으로 내밀어 팔다리를 일자(一字)가 되도록 쭉 뻗는다. 머리, 양 팔꿈치, 양 무릎이 모두 땅에 닿는다고 해서 ‘오체투지(五體投地)’라고 불리는 큰절이다. 온몸을 땅에 던져 부처님께 최상의 존경을 표하는 셈이랄까. 오체투지를 쉼 없이 반복하는 참배자의 모습에 놀라움을 넘어 숙연함마저 느껴졌다. 70여 년 전 라싸를 방문한 하러의 눈에도 티베트인의 신앙심은 남달라 보였다. 티베트인이 성지로 여기는 조캉사원에서 참배자들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다.

사원 앞에는 넓적한 돌이 깔린 테라스가 있었다. 그 돌은 참배자들이 1,000년에 걸쳐 절을 올렸기 때문에 거울처럼 반질반질하게 닳고 움푹 패어 있었다. … 티베트에서는 사람들이 문명의 부름에 따라 밤낮으로 쫓겨 다니지 않는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종교에 젖어서, 자신의 진정한 영혼을 찾을 시간을 가지고 있다.

천불절벽 앞에서 오체투지를 올리는 참배자들

티베트인이 간직한 소망

하러가 라싸에 도착했을 때 티베트는 제14대 달라이라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당시 11세 소년이었던 달라이라마는 외국에서 온 이방인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티베트 바깥세상이 궁금했지만 도통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러는 달라이라마의 개인교사 역할을 맡았지만 둘의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중국 군대가 라싸를 점령하자 달라이라마는 만 15세의 어린 나이에 티베트 국왕으로 공식 등극했다. 그리고 중국의 억압에 맞서 티베트의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고자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신변의 위협이 가시화되어 1959년 티베트를 떠나 인도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비폭력을 통한 티베트의 자치권 획득을 호소하고 있다.
달라이라마가 망명한 후 중국은 티베트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황량한 고원에 도로와 철도를 깔아 대규모 인원과 물자를 수송 했다. 지금은 북경과 라싸를 잇는 직통열차가 마련되어 있을 정도다. 이런 통로를 따라 한족이 티베트에 쏟아져 들어오자 티베트 고유의 문화와 전통이 사라져갔다. 한족의 자본력이 티베트 경제를 장악하자 티베트인이 지켜온 삶의 터전이 좁아져갔다. 티베트인이 자랑으로 여기는 포탈라궁 꼭대기에 중국의 오성홍기가 펄럭이는 모습은 현재의 티베트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티베트를 떠나기 전 성스러운 호수로 알려진 남초를 찾았다. 파란 물결 너머로 설산이 늘어선 모습이 ‘하늘 호수’라는 이름에 잘 어울렸다. 호숫가에서 티베트 전국에서 몰려온 순례자들을 만났다. 입으로 ‘옴마니반메훔’을 외면서 손으로 마니차를 돌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오체투지로 절을 하며 나아가는 순례자도 보였다. 둘레가 약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남초를 오체투지로 돈다니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신앙심이다. 이처럼 티베트인은 길을 걷는 것 자체를 신앙의 도구로 삼는다. 매 걸음 신에게 다가가는 의미를 되새기면서. 호숫가 옆에 솟은 작은 바위산에 오색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바람의 말(風馬)’이라는 뜻을 지닌 ‘룽다’였다. 티베트인의 염원이 바람에 실려 멀리멀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티베트가 독립을 찾을 수 있기를,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기를, 세상 모든 생명이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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