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라고 집에만 있을 수 있나. 추위에 맞서야 맷집도 좋아지는 법. 게다가 마음 깊이 울림을 주는 풍경 속을 거닌다면 더할 나위 없다. 경북 안동에 있는 퇴계오솔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변길로 꼽힌다. 시린 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고즈넉한 겨울 숲길을 걷는 정취는 봄·여름·가을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린 트래블 | 글 이은정 기자 사진 안동시청 관광진흥과·안동축제관광재단 제공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 선생은 경북 안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우리나라 정신의 수장으로 꼽힌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뒤 1590년에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고 전한다.
이황 선생은 열세 살 무렵부터 학문을 배우려고 숙부인 이우 선생이 청량산 중턱에 지은 오산당(현재의 청량정사)까지 먼 길을 낙동강을 따라 오갔다. 산과 강 사이에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아름다운 풍광과 정취에 반해 시를 여러 편 지었고 스스로를 청량산인으로 부르기도 했다. 퇴계오솔길은 이황 선생이 즐겨 다닌 그 길에서 유래했다. 대개는 안동 도산면에 위치한 단천교에서 시작해 녀던길 전망대를 지나 농암종택까지 이르는 3km 남짓한 구간을 일컫는다. 혹자는 여기에 농암종택에서 가송마을까지를 더하거나, 트레킹을 제대로 즐기는 사람들은 아예 도산서원을 기점으로 이육사박물관, 단천교를 거쳐 가송마을까지 18km에 달하는 구간을 말하기도 한다.
이황 선생은 벼슬을 물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학문은 곧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봉화에 있는 청량산에 즐겨 올랐고, 이후 안동을 중심으로 한 선생의 후학은 물론 경상도 선비들까지 그를 따라 청량산을 자주 오가며 그의 학문을 기렸다고 한다. 이 덕분에 퇴계오솔길은 학문의 길이라고도 불린다.
퇴계오솔길은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단천교에서 출발해 걸으면 왼쪽과 정면에는 산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강이 따라 흐른다. 기점인 단천교를 지나 조금 걸으면 ‘녀던길’이라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녀던길’은 흔히 ‘옛길’로 부르는데 이황 선생의 후손은 이를 ‘예던길’을 잘못 알고 쓴 것이라고 말한다. ‘예(曳)는 끌다, 고달프다’라는 의미. 선현들이 신발과 지팡이를 끌고 다녔던 길이라는 뜻으로, 이황 선생이 한가로이 사색하며 걸은 게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그 해답을 찾고자 치열하게 고민하며 걸었다는 의미다. 표지석을 보고 2km 남짓 더 걸으면 녀던길 전망대에 도달한다. 이곳에서는 고고한 낙동강 줄기와 자갈밭, 저 멀리 청량산, 깎아지른 절벽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부터 농암종택까지는 길을 우회해야 한다. 강을 따라 앞으로 난 오솔길을 걸으면 좋으련만, 사유지라 곳곳이 막혀 있고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안동시청이 건지산 자락을 따라 우회 길을 만들어 놨으니 그 길을 걷는 게 낫다.
퇴계오솔길은 구간이 길지 않고 힘들면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도 곳곳에 있으니 가족 혹은 연인이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트레킹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안동시가 퇴계오솔길 외에 선성현길, 마의태자길 등 91km에 달하는 ‘안동선비순례길’을 조성해 지난해 11월부터 전면 개방했으니 이에 도전해봐도 좋겠다.
퇴계오솔길을 제대로 느끼며 걷고 싶다면 도산서원에 먼저 들러볼 일이다. 도산서원은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지은 곳. 이황은 벼슬을 물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낙동강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 서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쳤다. 이황이 타계한 후 그의 후학이 서당을 중심으로 사당과 서원을 확장해 1576년에 완공한 도산서원은 이듬해 국가로부터 특별히 사액서원으로 공인받았다. 이때부터 도산서원은 영남 유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흥선대원군 시절 사원 철폐 위기에서도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아 현재까지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성지로 꼽힌다.
도산서원의 건축물은 이황 선생의 삶과 학문을 본받아 대체로 간결하고 검소하다는 평이다.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과 중앙의 전교당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돼 있다. 동서로 나뉘어 있는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이며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배향 공간으로는 이황 선생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와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등이 있다. 이 밖에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 등이 있다. 낮은 기와 담장을 따라 이리저리 거닐며 여러 건축물을 쓰임새에 따라 요모조모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입장료는 어린이, 청소년, 일반이 각각 600원, 700원, 1,500원이다. 매주 마지막 수요일인 문화가 있는 날은 무료 입장.
위치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관람시간 연중무휴, 11월~2월 09:00~17:00,
3월~10월 09:00~18:00
문의 054-840-6576
퇴계오솔길의 기점에 있는 농암종택은 조선의 학자 이현보 선생의 종택이다. 이현보 선생은 1542년 종2품 영감 신분으로 물러난 이후 안동에 머물며 조정의 여러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농부를 자임하며 물욕 없는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어부가’, ‘농암가’ 등 여러 시가 작품을 남겨 강호문학의 창도자로 평가받는다.
농암종택은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별당인 긍구당 등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여기저기 흩어졌다가 이후 후손들이 이곳으로 이전, 복원했다. 이현보 선생은 나이 차를 넘어 퇴계와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전한다. 이현보 선생은 이황 선생의 숙부와 함께 과거에 급제했고 퇴계는 이현보 선생의 아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던 것. 그럼에도 이현보 선생과 이황 선생은 서로를 신뢰하며 어울려 문학과 철학을 논했다고 한다. 농암종택이 퇴계오솔길 기점에 자리하게 된 것도 이황 선생과 이현보 선생의 이런 인연 때문이다.
농암종택은 현재 고택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개방됐다. 독립공간인 긍구당을 비롯해 사랑채, 대문채 등 12개 방을 이용할 수 있으므로 퇴계오솔길에 다니러 왔다면 성현의 정신이 깃든 곳에서 느긋하게 마음을 내려놓고 하룻밤 묵어도 좋겠다.
위치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62-133
문의 054-843-1202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고산정은 이황 선생의 제자인 성성재 금난수 선생이 공부하던 곳이다. 선생이 서른다섯 되던 해에 가송협에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하며 유유자적했다고 전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인 이곳은 3m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 위에 자연석을 그대로 놓고 기둥을 세웠다. 정자 자체로도 멋스럽지만 특히 이곳은 안동8경의 하나인 가송협의 절벽 아래에 자리하고 있어 우리나라 10대 정자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앞으로는 낙동강이 고고하게 흐르고 뒤로는 청량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낙동강 건너에 펼치는 절벽인 내병대의 풍경은 압권이다. 설립 때부터 절경으로 유명해 이황 선생도 여러 번 제자들과 함께 찾아와 시를 짓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현재도 금난수 선생과 이황 선생의 시가 현판으로 남아 있다.
위치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7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