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up

‘인간적 성공’의 상징 “제인 구달(Jane Goodall)”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어떤 이는 성공한 삶을 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성공 앞에서 좌절한다. 하지만 저마다 성공의 기준이 다르기에 누구도 함부로 다른 이의 삶을 두고 성공과 실패를 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진정한 성공을 이뤘다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세계적인 동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제인 구달(Jane Goodall)이다.
커리어 up | 글 박근희 조선일보 프라이데이 섹션 기자

‘침팬지의 어머니’로 불리는 제인 구달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비서학교를 졸업했지만 1962년 학사학위 없이 캠브리지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해 1965년 박사학위(동물행동학 박사)를 취득했다. 그 후 미국 시러큐스대, 토론토대, 파리 아메리칸대를 비롯한 세계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에는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을, 2003년에는 작위급 훈장인 2등급(DBE)을, 2006년에는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를 받았다.
제인 구달의 삶은 세속적인 잣대로 봐도 ‘성공적’이다. 전문 교육의 산실이라 여겨지는 대학을 거치지 않고도, 엄밀히 말하면 ‘고졸 출신’으로 세계적인 영장류학자, 환경운동가가 되었으니. 하지만 오늘날 제인 구달이 성공적인 삶의 롤 모델로 평가받는 것은 그에게 부여된 명예나 지위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한평생 걸어온 발자취와 자연, 동물, 환경을 대하는 태도는 세속적 성공을 꿈꾸며 앞만 보며 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자극이 되기에 충분하다.

 

열정 하나로 침팬지 보호구역에 들어간 첫 여성 연구원

제인 구달은 1934년 영국 런던에서 엔지니어인 아버지, 소설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아버지가 군에 입대하며 제인 구달은 어머니, 동생 주디, 외할머니와 함께 영국 남부 해안마을인 버치스에서 살게 된다. 영불해협까지 걸어서 몇 분 걸리지 않는 전원 풍경을 간직한 그곳에서 제인 구달은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보낸다. 집 근처 호텔집에 살던 개 ‘러스티’를 관찰하고, 닭이 알을 낳는 광경도 지켜보고, 때로 책을 보면서 아프리카에 대한 꿈을 키우며. 여고 시절 전교 2, 3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꽤 잘했지만 제인 구달은 집안 형편상 열여덟 살에 학창 시절을 끝내야 했다. 하지만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그녀가 하고 싶은 건 단 한 가지, 동물을 관찰하고 동물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었으니까.
이후 엄마의 권유로 그녀는 비서학교에 들어가 비서자격증을 딴 뒤 병원 · 학교 행정실 · 영화제작사 직원 등으로 일한다. 그러다 학교 친구 클로로부터 그녀 삶의 전환점이 될 만한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아프리카 케냐로 초대한다는 편지였다.
제인 구달은 아프리카에 갈 돈을 벌기 위해 박봉이었던 영화제작사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호텔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매주 번 돈과 팁을 응접실 양탄자 밑에 차곡차곡 저축했다. 그리고 넉 달 만에 아프리카를 왕복할 수 있는 여비를 마련했다.
1956년 꿈에 그리던 아프리카로 간 제인 구달은 클로의 농장에서 3주를 보내고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미리 구해둔 회사에 다니며 자신이 좋아하는 야생동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곳에서 누군가의 조언으로 인류학자이자 고생물학자인 루이스 리키를 만난다. 운이 좋아 그의 비서가 된 그녀는 꿈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는 기회를 잡는다.
현존하는 생물 가운데 인류와 가장 가까운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 대형 유인원에 관한 현장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루이스는 제인 구달의 열정을 단박에 알아봤다. 비록 그녀가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고, 학위나 경험도 없었지만 침팬지 연구를 가장 꼼꼼하고, 끈기 있게 할 적임자라고 확신했던 것. 제인 구달이 현장 연구원을 자원하자 루이스는 그녀를 연구원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루이스가 연구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연구 허가를 받는 동안 제인 구달은 영국으로 돌아와 동물원에서 일하며 ‘어깨 너머’로 침팬지에 관한 ‘선행학습’을 한다. 그리고 1960년 7월 16일 제인 구달은 드디어 침팬지의 땅, 탕가니카(탄자니아) 곰비 침팬지 보호구역에 첫발을 내딛는다. 당시 경험도, 학력도 없는 젊은 여자가 혼자 밀림에 들어가 침팬지를 연구한다는 사실에 모두가 코웃음을 쳤지만 10년 뒤 세상은 발칵 뒤집힌다.

침팬지 연구에 일생 바친 뒤 자신만의 환경운동 펼쳐

그녀는, 침팬지가 풀줄기와 같은 연한 나뭇가지를 도구 삼아 개미구멍을 쑤셔 흰개미를 잡아먹고, 열매를 따 먹을 때 나뭇가지를 치며, 돌멩이를 망치처럼 이용해 견과를 으깬다는 연구 보고를 통해 ‘오직 인간만이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한다’는 통념을 뒤엎었다. 또 침팬지가 채식뿐만 아니라 사냥과 육식도 즐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침팬지를 연구하며 온갖 논란의 중심에서 우여곡절을 겪지만 그녀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이후에도 침팬지가 동족을 살해하는 것을 관찰해 침팬지의 잔인한 면모와 어두운 본성, 서열 관계 등을 밝혀낸다. 그리고 오만한 인간들에게 유명한 말을 남긴다. “침팬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인간과 닮았다.”
그녀의 침팬지 연구는 40년간 지속됐다. 젊은 연구원일 때 밀림에 들어간 그녀는 침팬지와 함께 늙어갔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단순히 열정이나 끈기, 집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직 동물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 침팬지 연구를 마친 후 환경운동가가 된 그녀의 다음 행보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사실 제인 구달은 연구하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환경보호 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다는 오해와 비난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동물학자로서 있는 그대로 약육강식의 세계를 관찰했을 뿐 연구를 마친 후 자신의 방식대로 환경보호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야생동물을 연구하면서 아프리카의 환경이 급속도로 파괴되어가고 인간과 동물 모두 비참한 처지에 빠진 것을 목격한 제인 구달은 1977년 야생동물에 관한 연구와 교육, 보호를 위한 ‘제인 구달 연구소’를 설립하고 1991년 탄자니아 학생 16명과 ‘뿌리와 새싹(Roots & Shoots)’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현재 ‘뿌리와 새싹’은 120여 개국의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젊은이들로 구성된 15만 개 그룹이 참여하는 세계적 풀뿌리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녀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1년에 300일 이상 세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구와 환경을 위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어쩌면 애초에 제인 구달이 선택한 야생동물 연구라는 것은 세속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제인 구달의 삶이 성공적인 삶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야생동물 연구를 통한 학문적 성공을 차치하고라도 그녀가 일생 동안 주위 사람들과 동물에게 일관되게 보여준 인간적 아름다움 덕분이 아닐까?

제인 구달의 명언으로 본 성공 전략

“절망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황을 바꾸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제인 구달은 루이스 리키를 만나 꿈을 이룰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얻었지만 그녀가 꿈을 간직할 수 있도록 도운 건 어머니였다. 아프리카에 야생동물을 관찰하러 간다는 그녀의 꿈에 대해 사람들이 ‘무모한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네가 진실로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열심히 노력하며, 기회를 붙잡는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대로 네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네게 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평생 이 메시지를 잊지 않고 절망의 상황이 올 때마다 상황을 바꾸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아프리카에 가기 위해 웨이트리스 일을 하며 차곡차곡 왕복 여비를 마련했고, 침팬지를 연구할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동물원에서 일을 하며 침팬지에 대해 공부하는 등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인 구달이 삶을 대하는 자세였다.
그녀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작고 사소한 지금의 선택들이 자신을 바꾸고,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했다. “어느 누구라도 매일 조금씩은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제인 구달이 남긴 명언 중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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