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up

위베르 드 지방시

헵번만큼이나 영화 같은 삶을 산 ‘헵번 룩’의 창시자

요즘 신조어 중 ‘패완얼’이란 말이 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란 뜻.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 아닌 패션을 만든 사람의 정신이다. 오드리 헵번의 ‘헵번 룩’을 탄생시켰던 명품 브랜드 ‘지방시(Givenchy)’엔 세계적인 패션 거장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의 성장 스토리와 패션을 향한 열정, 장인정신이 숨어 있다. 지난 3월 9일,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평생 정신적 우정을 나누었던 자신의 뮤즈(Muse,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여신)이자 배우인 오드리 헵번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위베르 드 지방시. 패션을 잘 몰라도, 지방시는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커리어 up | 글 박근희 조선일보 ‘friday’ 섹션 기자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리틀 블랙 드레스 창시자

패션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1962년)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은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LBD) 정도는 기억한다. 몸에 착 감기듯 완벽하게 실루엣을 살려주는 리틀 블랙 드레스는 당시 거추장스러운 장식에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여 편하지도, 실용적이지도 않았던 전통 드레스 디자인을 한결 편안하게 진화시키며 패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다. 이 드레스를 디자인한 사람이 위베르 드 지방시(이하 지방시)다. 실제로 코르셋과 타이트한 상의를 선호했던 파리 쿠튀르(couture, 유명 디자이너 제품 또는 고급 여성복) 업계는 지방시 등장 후 입었을 때 편안함을 눈에 띄게 고려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지방시가 ‘여성의 허리를 해방시킨 디자이너’로 평가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프랑스 지방시 귀족 집안 출신 법학도에서 재봉사로

대개의 경우 영웅이나 시대의 우상이 된 인물들은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한 성공을 이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불우한 환경에서도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며 끝내 위기나 절망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는 과정을 밟고 고난을 극복했기에 사람들에게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방시의 성공 과정은 조금 다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다.
1927년 프랑스 북서부 도시 보베(Beauvais)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지방시는 예술적이고 상류 부르주아적인 가풍 속에서 자랐다. 2세 때 아버지가 인플루엔자로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어머니, 형 장 클로드, 외조부모와 함께 파리 북쪽의 보베에서 살았다. 지방시의 외조부는 예술가로 시작해 직물 공장을 책임지던 인물이었다. 어머니도 패션을 대단히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영향으로 그는 8세 때 이미 어머니의 패션 잡지를 즐겨 보았으며, <보그> 등 잡지 속 드레스를 그리거나 만들어 인형에게 입혔다. 10세 때인 1937년 파리만국박람회 패션관에 방문한 뒤 고급 맞춤복에 매료됐다. 가족들은 법학을 공부한 그가 고위 전문직 종사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공증인 사무실 대신 오트 쿠튀르(Haute curturie, 고급 의상점)를 선택했다.

당대 내로라하는 거장들 밑에서 일하며 자신만의 영역 구축

패션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지방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 패션계를 이끈 거장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 호기심에서 시작된 패션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지방시는 1944년 17세가 되던 해에 본격적으로 패션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가 파리 일류 예술학교에 다니며 실력을 쌓아나갔다. 그가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들고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스페인 출신의 유명 쿠튀리에(curturier, ‘오트 쿠튀르’의 대표 남성 디자이너)인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이하 발렌시아가)의 살롱이었다. 지방시는 발렌시아가를 찾아가 자신의 드로잉을 보여주며 그의 어시스턴트가 되려 했다. 하지만 당시 발렌시아가는 그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감각은 마음에 드나 경력을 더 쌓아서 오라”고 조언했다. 지방시는 실망하는 대신 그 길로 경험을 쌓기 위해 파리에서 가장 패셔너블하기로 소문난 패션 살롱 디자이너 자크 파트가 운영하는 ‘자크 파트 하우스’에 찾아갔고 바로 입사했다. 이 살롱에서 자크 파트에게 사사한 지방시는 일을 하며 자신이 취약한 드로잉 실력을 키우기 위해 ‘에콜 데 보자르(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1951년 파리 알리드 드비니 8번가에 자신의 살롱을 열기 전까지 8년 동안 지방시는 자크 파트부터 당대 패션을 이끈 거장 로베르 피게, 뤼시앵 르롱, 엘사 스키아파렐리 등이 이끄는 파리의 주요 의상실에서 일하며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갔다. 특히 프랑스 방돔 광장에 위치해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있던 초현실주의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부티크에서 일하며 그는 유명 고객들을 소개받았고, 패션계에서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점차 명성을 얻게 된 지방시는 1954년 스키아파렐리가 부티크 문을 닫았을 때 그곳의 고객들을 흡수하며 더욱 승승장구했다.

  

발렌시아가와 교감 · 협업하며 자기 발전

지방시는 1953년 뉴욕에서 발렌시아가를 만나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조르주 상크가(街) 양옆에 각각의 살롱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은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허리끈이 없고 자루처럼 생긴 드레스(Sack), 건축적인 직선을 강조한 여성용 슈트가 이 시기에 나왔다. 발렌시아가는 자신의 스케치까지 공유할 정도로 지방시를 신뢰했다. 두 사람 간에 형성된 긴밀한 협업 관계는 경쟁이 심한 패션계에서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발렌시아가는 타고난 선생이었으며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고,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읜 지방시는 그를 멘토이자 스승으로 여기고 따랐다. 둘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로 발전해나갔다. 발렌시아가는 1968년 자신의 살롱 문을 닫았을 때 그를 걱정하는 VIP 고객들에게 지방시의 고객이 되어줄 것을 권할 정도였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자에게도 지방시를 찾아갈 것을 권유했다. 훗날 이 기술자는 지방시의 수석 재단사가 된다.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도 지방시는 자만하지 않았다. 스승인 발렌시아가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계승 · 발전시켰으며 거기에 자신만의 개성을 더해 ‘지방시 스타일’을 완성해나갔다.

자신의 뮤즈, 오드리 헵번과 평생 우정 나누며 ‘햅번 룩’ 남겨

위베르 드 지방시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으니 세계적인 스타 오드리 헵번이다. 지방시는 과거 인터뷰에서 “나는 내 인생에서 두 가지의 크나큰 특권을 누렸다. 그건 바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오드리 헵번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발렌시아가만큼이나 헵번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지방시는 1953년 영화 ‘사브리나’를 찍던 오드리 헵번과 만난다. 지방시를 직접 찾아가 옷을 고른 오드리 헵번은 새 영화를 시작할 때면 언제나 지방시에게 달려갔고 지방시가 만든 옷만 입었다. 지방시는 사브리나의 의상으로 오스카상 의상 디자인 부문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오드리 헵번도 지방시를 통해 ‘헵번 룩’과 ‘헵번 스타일’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패션 세계를 구축해갔다.
두 사람은 여배우와 디자이너가 아닌 사생활의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처럼 지냈고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창의적인 작업들을 놀이처럼 즐겼다고 전해진다. 헵번은 지방시의 모든 옷을 빛나게 해주는 역할을 했고 지방시는 그녀에게 영감을 받아 헵번의 작품마다 새로운 패션을 탄생시켰다. 지방시가 자신의 뮤즈인 헵번을 위해 제작 · 헌정한 향수 ‘랑떼르디’(L’Interdit, 프랑스어로 ‘금지’)를 헵번이 자신이 죽기 전까지 그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지방시는 발렌시아가 이후 재단을 가장 완벽하게 하는 디자이너로 칭송받으며 프랑스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렸지만 1988년 다국적 럭셔리 그룹 LVMH(Louis Vuitton Moët Hennessy)에 매각했다. 이후 1995년까지도 지방시 디자인을 계속하다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패션계를 은퇴했다. 은퇴 전 지방시는 한 인터뷰에서 “후세에게 어떤 유산을 남길 것 같냐?”는 질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지금의 일을 내 스스로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느낄 때 행복하다. 이 자체가 아름다운 나의 유산이며 다른 어떤 찬사도 필요하지 않다.”

지방시에게 배우는 커리어 팁

01 지방시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를 찾아갔지만 그로부터 경험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돌아온다. 이후 자신에게 부족한 경험과 실력을 갖추기 위해 당대 유명 디자이너의 아틀리에나 살롱, 부티크에 찾아가 자신의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은 뒤 다시 발렌시아가를 만나 그의 신뢰를 얻는다. 자신에게 부족한 커리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한 지방시가 당대 가장 완벽함을 추구하는 쿠튀리에라 평가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02 1951년 지방시는 자신의 살롱을 연 후 모든 것을 직접 지휘했다. 한 매체는 “지방시가 살롱에서 고객들을 직접 응대했고, 진열된 모자를 정리하고 계절에 따라 매장을 새로 단장하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지방시는 쿠튀리에로 활동하는 내내 자신의 살롱을 열정적으로 이끌었으며 새로운 컬렉션과 상품 라인을 갖춘 매장을 여는 등 모든 사업에 활발히 개입한 편이었다. 그는 세계 무역 박람회, 각종 패션 페스티벌, 향수 페스티벌, 화장품 심포지엄, 프랑스와 이탈리아 및 스위스의 원단 회사에서 주최하는 프레젠테이션, 대형 백화점 체인의 프로모션 행사, 자선기금 마련 갈라 행사 등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지방시는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후에도 그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관찰했고, 그것을 자신의 패션에 적용했다. 1995년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서 은퇴하기까지 40년 넘게 현역 디자이너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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