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미국 언론은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34억 달러를 또 기부했다고 보도했다. 버핏이 올해까지 13년간 기부한 누적액은 309억 달러(약 34조 원)가 넘는다. 그런 전설적인 투자자이자 ‘기부 왕’인 워런 버핏이 존경한 인물은 따로 있다. 15달러짜리 플라스틱 시계를 차고 허름한 식당에서 소박한 식사를 즐기며 자신 명의의 집도, 차도 없이 이코노미클래스를 타고 다니는 미국의 자선사업가이자 세계적인 면세점 체인 DFS(Duty Free Shoppers)의 공동 창업자, PIC 설립자
척 피니(Chuck Feeney, ‘찰스 F 피니’의 애칭)다.
커리어 up | 글 박근희 조선일보 ‘friday’ 섹션 기자
‘돈만 밝히는 사람’에서 ‘기부 영웅’으로
1997년 세계적인 면세점 체인 DFS의 매각 문제로 공동 창업자인 척 피니는 법정 분쟁에 휘말려 조사를 받게 된다. 그의 사무실은 압수수색을 당했고 이로 인해 그만의 은밀한 ‘비밀 장부’가 발각되기에 이른다. ‘뉴욕컨설팅’이란 이름의 회사 명의로 15년간 수억 달러를 횡령한 듯 추정되던 비밀 장부의 정체는 얼마 뒤 반전의 결과를 내놓는다. 횡령을 위한 비밀 장부가 아니라 세상을 감쪽같이 속이고 자신의 재산을 기부해온 그만의 ‘비밀 기부 장부’였던 것. 척 피니는 15년 동안 남몰래 약 2900회에 걸쳐 수십억 달러를 기부했으며 1982년 비밀리에 애틀랜틱 필랜트로피즈 기부 재단(이하 애틀랜틱 재단)을 설립해 미국은 물론 베트남, 필리핀, 쿠바 등 도움이 필요한 나라의 의료 · 교육 분야를 지원했다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지며 단숨에 ‘기부 영웅’으로 떠올랐다.
사실 그의 비밀 기부 장부가 알려지기 전까지 그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악명 높았다. 소송에 휘말렸을 때 변호사 수임료마저 깎으려 했으며 경제인 모임에서도 계산을 하지 않으려고 일찍 자리를 뜨는 것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비밀 기부 장부가 발각(?)되면서 그는 ‘영웅’으로 떠올랐다. 자신의 기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기부를 포기한다 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2000년 중반 이후부터는 하루에 100만 달러(약 11억 원)를 매일 기부해 2017년까지 그가 기부한 총액은 우리 돈으로 약 9조5000억 원에 이른다. 그는 총자산 중 99%를 기부했으며 2020년까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크리스마스카드 판매로 시작해 DFS 공동 창업자가 된 ‘샌드위치 맨’
척 피니는 세계 대공황 시기인 1931년 미국 뉴저지에서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험사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간호사로 가정 형편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성실한 부모 덕분에 세계 대공황을 잘 견뎌냈다. 그의 어머니는 적십자에서 간호사로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고 아무도 모르게 선행을 베푸는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타인을 돕는 것에 익숙한 가풍 속에서 자란 피니가 돈 버는 일에 재능을 나타낸 건 열 살 때였다. 피니는 친구 아버지에게서 받은 크리스마스카드를 집집마다 다니며 파는 것으로 생애 첫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집배원을 도와 편지 부치는 일을 도우며 돈을 벌었다. 청소할 집을 찾아다니며 청소를 해주는 등 끊임없이 돈 벌 궁리를 했다. 이후 피니는 재학 시절에도 골프장 캐디로 일하거나 파라솔 대여 등을 하며 쉬지 않고 용돈을 벌었다.
피니는 미 공군에 입대해 일본에서 근무하며 일본어를 익혔다.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1952년 7월 제대하면서 수당으로 634달러 33센트를 받은 피니는 그 돈을 보태 코넬대학에 지원, 진학했다. 그곳에서 피니는 기업가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학생들이 밤에 배가 출출해도 마땅히 사 먹을 것이 없다는 점을 간파하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남학생 기숙사와 여학생 기숙사 주변에서 팔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대학 시절 내내 피니에겐 ‘샌드위치 맨’이란 별명이 따라붙었다. 샌드위치를 판 돈을 장학금에 보태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했다. 그렇게 남다른 대학 시절을 보낸 피니는 대학 졸업 후 프랑스 그르노블대학 정치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여덟 달의 석사 과정 후 피니는 지중해 해안에서 미 해군장교들의 자녀를 가르치는 미국 사람을 만났다. 피니는 해군장교들의 자녀들이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새로운 사업을 고안해냈다. 요즘 말로 치자면 ‘여름캠프’였다. 이 여름캠프에 약 70명이 등록했고, 피니는 직원까지 고용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프랑스 그르노블에 있는 동안 피니는 지중해 주변 항구에서 미 해군들을 상대로 면세주류사업을 시작하려던 에드먼드와 훗날 DFS의 공동 창업자인 코넬 대학 동문 로버트 워런 밀러를 만난다. 주류사업의 가능성을 타진한 피니와 밀러는 미국 해병들에게서 술 주문을 받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1958년엔 경쟁이 치열했던 주류사업에 이어 향수, 옷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을 팔며 피니는 밀러와 함께 사업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1960년대 유례없는 경기호황을 맞은 일본 관광객을 집중 겨냥하며 하와이와 괌을 시작으로 유럽 등지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았으며 새로운 사업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검소하게 생활하면 할수록 면세사업을 세계적으로 키우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경영서와 성공한 기업인들의 전기를 읽었다.
불안정한 시대도 그를 부호로 키우는 데 한몫했다. 1968년부터 1974년까지 월스트리트의 평균 주식은 70% 하락한 반면 같은 기간 DFS의 배당금은 1년에 몇백 퍼센트씩 올라갔다. 1977년에 이르러 연간 배당금은 3400만 달러. 피니와 밀러는 이때 각각 1200만 달러씩 가져갔다. 모두 현금으로.
경영에서 한 발 떨어져 기부 재단 설립 후 ‘살아 있는 기부 천사’ 등극
피니는 1971년 새로운 장소를 찾거나 전체적인 전략을 마련하는 일 등 회사의 굵직한 결정에만 관여하기로 하고 임원회의에서 최고 경영자 자리를 물려주며 직접 경영에서 한 걸음 떨어진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아일랜드의 금언을 자주 인용했던 그는 이후 기부를 위한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인다. 1982년 드디어 500만 달러의 자금으로 자선단체 애틀랜틱 필랜트로피즈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훗날 ‘비밀 기부 장부’ 사건으로 그의 기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그는 ‘기부계의 제임스 본드’처럼 살았다. 미국의 기업가이자 자선사업가 앤드루 카네기를 존경했던 피니는 재단에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카네기의 에세이를 선물했다고 한다. “부자란 과시나 허영을 멀리하며 소박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카네기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그는 평소 부를 표시하는 여러 가지 장식품과 값비싼 물건들에 불편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으며 의식적으로 검소한 생활을 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중고 자동차를 탔고 사회 부유층과 어울리는 사교모임도 싫어했다.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져 익명으로 살고 싶어 가족들과 조용한 곳에서 지낸 적도 있다. 사업이 한창 번창했을 때도 빛바랜 셔츠에 무명 작업복을 입고 다니기 일쑤였다.
우연히 선행이 알려진 후에도 여전히 애틀랜틱 필랜트로피즈 의장으로 지내며 ‘억만장자 아닌 억만장자’로 불리는 척 피니는 1996년 루이뷔통 모엣 헤네시 그룹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DFS의 지분을 모두 넘기고 여기서 발생한 수익을 자신이 설립한 재단에 기부해 사회사업을 위해 쓰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화려한 삶보다 소박한 삶이 유행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장 잔고와 명품 시계가 행복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척 피니는 말한다. “부(富)는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죽을 때 부자인 것은 불명예”라고.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라
척 피니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불고 있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의 준말)을 일찍부터 강조해왔다.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 일에도 균형점이 있어야 하며 일과 가족,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했다. 스스로도 일에 심취해 있었으나 아이들의 학교를 위해 이사하거나 내려놓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휴가를 즐기되 끊임없이 배울 수 있는 것을 찾거나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돈 벌기 위해 일하지 않았다. 부는 그 과정(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따라온 것일 뿐
유년과 학창 시절 피니는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벌었다. 하지만 사업을 시작한 이후엔 돈보다는 사업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노력과 존재 의의를 찾으려 했다. 그의 말대로 부는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따라온 것일 뿐. 재산을 유지하고 불리는 데 힘을 쏟는 대신 기부를 선택한 건 어쩌면 그로선 당연한 결과다.
자랑하지 마라. 받은 이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면 절대 자랑하지 마라
피니는 부자가 되어갈수록 주변인들을 세심하게 살폈다. 동료들에게 너그러웠고 직원이나 직원의 자녀들의 치료비를 지불하는 일도 잦았다. 늘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했다. 기부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것도 기부자와 수혜자 모두를 배려한 마음이었다. 그의 어머니처럼 도움을 받는 사람이 절대 눈치채지 못하게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돈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신발 두 켤레를 한 번에 신을 순 없다
피니는 돈의 힘과 매력을 인정하되 한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재화의 한계에 비추어 욕심을 내려놓길 바랐다. 부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해야 하며 그게 부자들의 도덕적 의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