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인문학

고양이에 대하여

버나드 쇼, 에즈라 파운드, 장 폴 사르트르, 미셸 드 몽테뉴, 미셸 푸코, 마크 트웨인, T.S 엘리엇,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 폴 고티에, 무라카미 하루키, 파블로 피카소, 프리다 칼로, 앤디 워홀, 살바도르 달리, 앙리 마티스, 오드리 헵번…… 이들을 집사로 부리는 자가 있으니 바로 ‘고양이’다.
에너지 인문학 | 글 김윤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 계간 <어린이책이야기>
편집 주간 일러스트 이은주

고양이와 나

한가한 어느 날엔, 침대에 기대어 책을 읽는다. 오래지 않아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책을 들고 있던 손이 스르르 내려앉는다. 갈등은 가볍고 욕망은 끈질기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 격렬한 욕망. 이런 내 몸과 마음의 기척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나의 그녀들, 나의 고양이 유키와 솜이다. 머리맡에 앉아 있던 유키는 말랑한 몸을 길게 늘이며 느긋한 눈빛을 지그시 보낸다. 발치에 누워 있던 솜이는 입을 삼각형 모양으로 만드는 예의 그 큰 하품으로 응답한다. ‘잠이 오니 잠을 청하는 것이고, 망설임은 잠을 쫓을 뿐이니, 이대로 한숨 잔들 뭐 그리 나쁜 일이 되겠는가, 인간!’ 그래 고양이가 그렇다면 그런 것! 집사 된 인간은 고양이의 말을 기꺼이 따를 뿐이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자칭 집사로 명명한다. 인간을 고양이의 아랫자리에 놓는 태도에 반감을 가질 이도 있겠지만, 이것이 꽤나 오래된 존재론적 문제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고양이 집사인 진중권의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천년의상상, 2017)에 따르면 16세기 프랑스의 철학가이자 사상가인 몽테뉴도 그 못지않은 집사였던 모양이다. 몽테뉴는 어느 날 고양이와 놀아주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고양이와 놀 때에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시간을 보내는 것인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동물에게도 이성과 영혼이 있다고 굳게 믿은 몽테뉴는 이 질문으로 인간중심주의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동물도 추론하고, 판단하고, 기억할 수 있으며, 자기들끼리 소통도 하고, 사회를 조직할 줄도 안다는 것이다. 인간만이 말을 할 수 있다고? 그렇지 않다. 동물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오히려 인간이 동물과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잃었다는 것. 고양이와 함께 살아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꼭 해보았을 말. “너 사실은 사람이지?” 이 말은 고양이와 내가 하등의 차이가 없음을 인정하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사실 나는 이 말을 꽤나 자주 하는 편이다. 물론 그녀들은 나의 고백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홀로 고귀하다. 깊은 눈초리로 나를 바라볼 뿐. 깨달음이 늦은 어리석은 인간은 그렇게 스스로 집사가 되어간다.

고요한 인내

나의 고양이, 유키와 솜이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 한다. 유키가 나에게 온 것은 약 1년 전이다. 유키는 고양이 번식장에서 태어났다. 고양이 공장이라고도 불리는 그곳은 펫숍에 팔기 위한 고양이를 물건처럼 생산하는 곳이다. 경영난에 몰린 주인은 고양이 50여 마리를 방치하고는 종적을 감추었고, 유키는 그곳에서 엄마, 다섯 형제와 함께 발견되었다. 태어난 지 2개월 무렵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유키를 입양하면서 알게 된 유키의 전사다.
솜이는 부산의 어느 골목에서 태어났다. 어쩐 일인지 인간 눈에 띄어 인간과 함께 살았는데, 생후 2개월 무렵에 다시 버려졌다. 짐승만도 못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던지 그 인간은 다른 골목 어딘가에 살고 있는 캣맘의 집 앞에 솜이를 놓아두었다. 그렇게 캣맘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가던 솜이는 TNR(길고양이를 포획해 중성화수술을 한 후 원래의 장소에 놓아주는 일) 과정에서 고양이 백혈병이라는 범백에 걸려 장시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내가 솜이를 만난 건 퇴원 후 약 한 달쯤 뒤였다.
깊은 밤, 가만히 앉아 있는 고양이의 뒤통수를 본 적이 있는가. 꼿꼿한 자세로 창밖 먼 곳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뒷모습은 어쩐지 고독해 보이기까지 한다. 고양이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다가 결국은 그 옆에 쪼그려 앉아 말을 건넨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 고개를 돌려 잠시 나를 바라보고 눈길은 다시 창밖으로 향한다. 흥미로운 것은 유키는 거실 쪽 베란다를, 솜이는 작은방에 달려 있는 뒤쪽 베란다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한밤중 거실 쪽 베란다에서 보이는 풍경이란 어둠뿐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불 꺼진 앞 동 아파트는 두껍고 네모난 암흑 장벽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키는 암흑의 한가운데를 응시하며 무슨 생각을 할까. 반면 솜이가 좋아하는 뒤쪽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제법 화려하다. 시야를 가로막는 건물이 없다 보니 멀리 번화가의 불빛이 한눈에 들어온다. 늦은 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까지. 무엇이 솜이를 그곳에 붙잡아두는 것일까.
고양이가 창밖을 내다보는 것은 자신의 영역을 탐지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에겐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공간이 자신의 영역으로 인식되는가 보다. 하지만 오도카니 앉아 있는 고양이의 뒤통수에서 철학하는 고양이를 본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미 내 멋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들의 고독이 닿는 거기에는 그들의 고향이자, 불행한 과거가 있을 것이라고. 고양이 번식장에서 태어난 유키에게 고향이란 네모난 암흑 속에서 떨던 두려움의 기억이지 않을까. 도시의 길에서 태어나 다시 길에 버려진 솜이에게 고향이란 번쩍이고 소란한, 그래서 더욱 고독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시작된 그녀들에 대한 내 이야기의 끝맺음은 쓸쓸하지만 다행히 아름답다. 그리하여 그들은 매일 밤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되 고요한 인내로 불행한 과거에 침몰되지 않는 법을 깨우치고 있다고.
현재 지구상에 살아남은 고양이의 태생을 생각해볼 때 불행하지 않은 고양이는 없다. 유키와 솜이처럼 그들의 고향은 필시 번식장이거나 길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귀하지 않은 고양이 또한 없다. 그들의 불행한 역사는 언제나 그들의 고요한 인내로 극복되어왔기 때문이다. 유키 옆에, 솜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나도 먼 데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의 과거와 상처를 생각해본다. 불행하지 않은 고양이가 없는 것처럼 상처 없는 사람 또한 없다. 부디 상처에 침몰되지 않고 나를 지킬 수 있기를. 고요한 인내로 나의 본성과 고유함을 지킬 수 있기를. 그래서 스스로 고귀해질 수 있기를. 나의 고양이들처럼!

공존의 기술

유키와 솜이는 약 7개월 간격으로 나에게 왔다. 유키가 먼저 솜이가 나중에. 유키와 솜이의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유키는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를 막아내야 했고, 솜이는 어떻게든 이 집에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날로 격렬해졌다. 둘 사이에서 쩔쩔매는 집사의 꼬락서니가 안쓰러웠는지 어느 순간 그들은 공존의 기술을 터득했다. 공간을 공유하되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나는 그것을 거리 두기의 배려라고 부른다. 가령 이런 거다. 유키가 앞 베란다에 앉아 있으면, 솜이는 뒤쪽 베란다로 간다. 유키가 캣타워에 올라가 앉아 있으면 솜이는 소파 위에 올라가 앉는다. 솜이가 내 다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유키는 조용히 내 머리맡으로 와서 앉는다. 나이 어린 솜이가 나를 졸졸 쫓아다니며 어리광을 부리면 유키는 못 본 척 지나쳐도 준다. 거리 두기의 배려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지침이다. 고양이는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고양이 안기나 고양이에게 뽀뽀하기가 그리 어려운 이유다. 만약 강제로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십중팔구 그들은 은신처로 숨어버린다. 그제서 미안하다 한들 소용이 없다. 배려를 모르는 인간의 후회만 있을 뿐. 공존하되 간섭하지 않고, 친밀감을 앞세워 강요하지 않기. 고양이에게서 배운 거리 두기의 배려는 관계 맺기의 어려움에 봉착한 인간들이 익혀야 할 삶의 기술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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