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인문학

시간

편지를 쓰는

사춘기 시절 맹목적으로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외로움을 견디던 아이가 이제는 익명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연서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 주고받았던 수많은 편지가 나를 소설가로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편지는 그 시절 나의 에너지원이었다.
에너지 인문학 | 글 백수린 작가 일러스트 이은주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 오랫동안 헤매고 다녔다. 하고 싶은 일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는 상태로 매일을 살았다. 그리운 이가 있지만 아무리 떠올려도 얼굴의 윤곽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처럼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의 나날이었다. 주관이 뚜렷해 일찍부터 진로를 정하고 자기의 삶을 완성하고자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가는 친구들의 뒤통수를 볼 때면 몹시 부러웠다.
한번은 오랜 친구에게 “나는 대체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친구는 조금 고민하더니 “네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을지는 상상이 잘 가지 않는데, 너는 언덕 위의 집에서, 누군가 편지를 보내오면 계속 답장을 해주는 할머니로 늙어 있을것 같아”라고 답을 해주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친구의 대답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누군가가 보내온 편지에 찬찬히 답장을 써주는 일. 그것은 내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한 일이었고, 가장 잘하는 일이 틀림없었다.

외로움으로 가득했던 학창 시절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인해 가까스로 사귄 친구들과 금세 헤어지는 일을 학창시절 내내 반복해야 했던 탓이 컸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시절에는 스마트폰은 물론, 개인 이메일 같은 것조차 없었다. 어른의 입장에서 마포구나 영등포구, 인천이나 서울 사이에 놓인 거리는 우정의 존속 여부를 가름할 정도로 대단한 거리가 아니었겠지만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그것은 세계의 이쪽과 저쪽처럼 아득한 거리였다.
처음 서울로 전학했을 때의 일이다. 개교기념일이라 새 학교가 쉬던 어느 날, 친구들이 그리워 딱 한 번, 엄마를 졸라서 예전에 다니던 학교에 놀러간 일이 있었다. 그날 나는 전학하기 전처럼 다른 아이들과 같이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는 화장실에 갔다. 새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되돌아간 학교에서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날 나는 고작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그곳에 더는 나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나와 어울리던 친구 무리 속에는 새로운 질서가 생겨 있었고 그들의 고민과 관심사를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이후 나는 두 번 다시 그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삶은 한쪽 방향으로만 읽을 수 있도록 쓰인 책이라는 것을, 그것도 불연속적인 삽화들로 느슨히
연결된 책이라는 것을 나는 열한 살 때 그렇게 배웠다.

편지를 보내고 기다리며 보낸 시간

그런저런 이유로 조금은 어두울 뻔했던 나의 학창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불행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크리스마스트리를 밝히는 전구처럼 점점이 박혀 나의 어둠을 밝혀준 즐거운 추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잦은 전학으로 인해 나는 보통의 아이들이 경험하는 평범한 교우관계를 맺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아무와도 우정을 가꿔나가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전학과 이사를 거듭하던 내 곁에 끝끝내 남은 친구들은 대부분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이었다. 다른 세상에 호기심이 많고, 스스로에게 생겨난 일들을 글로 쓰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 같이 학교에 다닐 때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고 각자의 생일파티에 서로를 초대하거나, 등하교를 함께한 적조차 없었던 친구들이었지만 그런 아이들은 내가 주기적으로 보내는 편지에 답장을 주었고, 며칠이 지나면 또 내게 먼저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렇게 수없이 많은 편지를 쓰면서 성장했다.
내가 가장 맹렬히 편지를 주고받았던 시절은 중학교 2학년부터 성인이 되기 전까지이다. 중학교 2학년 봄 나는 좀 더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곳은 심지어 한국도 아니었고, 영어를 쓰는 나라도 아니었다.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낯선 나라에서 외로움에 사무칠 때마다 나를 견디게 해주었던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같은반이었던 친구들의 편지였다. 아마도 처음에 아이들은 그들이 그때까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외국의 삶에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으로 내게 편지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편지를 써서 국제우편 봉투에 넣고 그것이 상대에게 닿기를 기다리는 몇 주의 시간과 또 그로부터 답장을 받기 위해 필요한 몇 주의 시간을 더 기다리는 것이 지루했던 대부분의 아이는 이내 나를 잊었다. 이번에도 내게 남은 친구들은 그 기다림의 과정을 즐겁게 생각하는 한 줌의 아이들이었는데, 내게는 그들만으로도 충분했다.
여전히 인터넷이 발달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시절 매일매일 편지를 써서 우체국에 갔다. 끝까지 나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친구들 역시 일기를 쓰듯이 내게 편지를 썼고, 잡지를 스크랩해 보냈고, 사진을 동봉했다. 전화요금이 비쌌으므로 서로의 음성을 들려주고 싶을 때 우리는 카세트테이프에 목소리를 녹음해 이런저런 작은 선물들과 함께 소포를 보내기도 했다. H.O.T나 S.E.S 같은, 내 또래 아이들의 삶을 뒤바꾼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를 나는 친구들이 녹음해준 테이프를 듣고 처음 알게 되었다. 친구들이 보내준 편지 속에 함께 들어 있던 아이돌 가수들의 얼굴은 내게 낯설었고 친구들이 말해주는 그 가수들의 매력을 먼 곳에 살던 나는 조금도 공감할 수 없었지만 그런 것들은 내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학교에서 돌아와 우편함을 열었을 때, 그 안에 얌전히 들어 있던 항공우편 봉투 그 자체였으니까.
예전에는 그 나이에 외국에 나가 있는 아이가 흔치 않았으므로, 외화에서나 다른 나라를 엿볼 뿐인 아이들의 편지 속엔 환상이 넘쳐났다. “그곳에는 파란 눈에 금발의 미소년이 많니?” 나는 현실 속에는 파란 눈과 금발을 지닌 남자보다는 대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남자가 훨씬 많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매일매일 인종차별을 겪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춘기를 한창 앓으며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견딜 수 없을 때면 나는 용돈을 모아 산 전화카드를 들고 집 앞 공중전화 부스로 내려가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카드의 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떨어졌다. 친구들은 국제전화 요금이 얼마나 비싼지 상상도 못 했으므로 사소한 이야기들을 계속 재잘댔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잔액이 소진되어 통화가 갑자기 중단되면 주소지가 불명확해 반환된 편지처럼 전화카드가 기계 밖으로 밀려났다. 전화 부스밖으로 나오면 바깥은 낯선 빛깔로 반짝였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는 오래 기다리게 한 것이 못마땅한 얼굴로 내가 그때까지 아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언어의 문장을 내뱉었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선물일지도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내게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은 내가 타인과 닿아 있음을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증거였다. 나는 글 쓰는 행위로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데는 물리적인 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워나갔다. 진로를 고민하느라 인생을 낭비하던 나는 이십 대의 끝자락에 소설을 쓰고 등단해 소설가가 되었다. 맹목적으로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외로움을 견디던 아이가 이제는 익명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연서를 쓰는 사람이 된 셈이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나는 단 하나도 버리지 않고 여전히 가지고 있다. 펼쳐보면 유치하고 민망해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그 편지들을 본가 옷장의 가장 위 칸에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때 주고받았던 수많은 편지가 나를 소설가로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 쓰는 것이 막막하고 어렵게 느껴질 때 나는 가끔씩 간절한 마음으로 우편함 속에 손을 뻗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그때 내 손끝에 닿았던 항공우편처럼,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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