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인문학
나와 만나는 시간, 아침일기
월요일에 단양 두 곳, 화요일 오후엔 진천, 수요일 첫차로 서울, 목요일엔 인천, 일요일 청주. 발송 준비를 마친 다음에는 주말까지 원고 두 개를 마감해야 하고, 다음 주에 치러질 ‘제2회 전국 동시인 대회’ 준비도 해야 한다. 강연, 강의, 마감, 회의, 편집과 교정, 그리고 다시 강의. 총체적 난국이다. 처방전이 필요하다.
에너지 인문학 | 글 송선미(아동문학가, <동시마중> 발행인) 일러스트 이은주
마더피스 카드는 메이저 카드 22장과 마이너 카드 56장으로 구성된다
안정적인 생계 수단을 포기하고 동시 전업자로 살기로 결심하면서 삶의 패턴이 완전히 달라졌다. 20년이 넘도록 평일엔 책을 읽고 주말엔 돈을 벌었던 단순했던 삶이, 평일이든 주말이든 방방곡곡을 누비는 신출귀몰한 생활이 되었다. 세 시간 강연을 위해 여섯 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하는 생활이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전국 곳곳에 있는 비슷한 인테리어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강의 준비를 하면서 들쭉날쭉한 일정을 치르다 보면, 여기가 서울인지 아니면 충주인지, 시차 적응이 안 될 때도 있다. 그렇다고 동시 생활자로서의 삶이 괴로운 것만은 아니다. 책 수십 권이 주지 못할,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깨우침에 놀랄 때가 많다. 무엇보다 몰랐던 세계, 몰랐던 사람과 만나는 기쁨이 크다. 아이들과 동시가 주는 위로와 치유의 힘을 이야기할 때나 어른들과 동시의 즐거움을 나눌 때면, 우연한 만남과 소중한 인연에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메이저 카드 22장에 선 카드(Sun card)와 문 카드(Moon card)가 함께 들어 있듯이, 한 사람에게는 외적인 만남과 함께 내적인 만남이 필요하다.
메이저 카드는 바보(Fool)의 떠남으로 시작된다
마더피스 카드는 메이저 아르카나 스물두 장과 마이너 아르카나 쉰여섯 장으로 구성된다. 메이저 아르카나엔 0번부터 21번까지의 번호가 붙는다. 메이저 아르카나 스물두 장은 0번 ‘바보(Fool)’가 스물한 장 카드 속 인물을 순서대로 하나씩 만나는 이야기, ‘바보의 여행’으로도 풀이된다. 바보의 여행은 바보가 1번 카드 ‘마법사(Magician)’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수비학에서 숫자 ‘1’은 선택과 결단을 의미한다. 숫자 ‘2’, ‘고위 여사제(High Priestess)는 양극단과 가능성을 의미한다. 숫자 ‘3’, ‘여황제(Empress)’는 다양성을 상징한다. 바보는 각각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는다. 질문은 질문하는 순간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저의 잠재력은 무엇입니까?”나 “제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은 무엇입니까?” 등으로 해볼 수 있겠다. 여행의 종착지는 21번 ‘세계(World)’ 카드다. 바보는 ‘세계의 여성(여신)’으로 성장하였고, 완성되었다. 그러나 ‘세계(World)’ 카드의 또 다른 의미는 ‘새로운 시작’이다. 여신은 다시 0번으로 돌아가 바보가 되어야 한다. 여행은 다시 시작된다.
내 하루의 시작은 ‘바보(Fool)’ 되기다. 0번 바보가 다시 ‘0’이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나듯, 매일 아침 페이지는 비워지기 위해 채워진다. 바보가 되기 위해 의식을 치르듯 하나씩 절차를 밟으며 준비를 한다. 자기 전, 알람을 맞추는 것이 의식의 시작이다. 여덟 시에 출발해야 한다면 여섯 시에, 여섯 시 삼십 분 차를 타야 한다면 네 시 삼십 분에 알람을 맞춘다.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 부엌에 가서 큰 컵에 물을 따라 마시고, 커피를 내린 뒤, 책상에 앉는다. 그리고 동시 열 편을 필사하기 시작한다. 열 편 중 마음에 드는 동시가 있으면 그 날의 동시로 삼고, 없으면 건너뛴다. 메인은 지금부터다. 경건한 마음으로 30분 알람을 맞춘다. 그리고 ‘아침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행복하게도 하루를 오롯이 집에서 보낼 수 있는 날에는, 한 시간 알람을 맞추고 아침일기를 쓴다.
‘아침일기’는 줄리아 카메론의 저서 『아티스트 웨이』(경당 2003)의 ‘모닝 페이지’를 나의 몸에 맞게 바꾼 것이다. 10년 전, 어린이 책을 읽는 어른들의 모임 ‘놀라운 아이’ 친구들과 함께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혼자였다면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아니 시작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 친구가 ‘놀라운 아이’ 모두에게 책 선물을 한 것이 계기였다. 우리는 함께 책을 읽었고, 함께 모닝 페이지를 써 나갔다. 『아티스트 웨이』에 소개된 모닝 페이지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공책 세 바닥에 떠오르는 생각을 무작위로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간단하지 않은가. 아무거나 쓰면 되니까 쉬울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힘들었다. 잠이 덜 깬 상태인 데다 평소 기록하는 습관이 있지도 않아서, 세 페이지는커녕 반 페이지도 못 채운 채 우두망찰하는 날이 이어졌다. 어떤 날은 “쓸 게 없다, 뭘 쓰지? 뭐라고 쓸까?”로 세 바닥을 채운 날도 있었다.
질문하는 시간
그런데 하루 이틀이 지나고 한 달여 가까워지던 어느 날, ‘페이지를 넘기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두 페이지를 넘기고 세 번째 페이지 반을 넘겼을 때,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내 안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두 페이지 반을 채웠던 감정적 토로나 이성적 다짐, 그 날의 할 일 등과 완전히 다른, 어떤 종류의 ‘느낌’과 만난 것이다. 감정과 이성이 가라앉기를 오래도록 기다렸다가, 잠시 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 후로도 가끔씩 모닝 페이지는 내 깊은 내면과 만나게 해주었다. 어떤 날은 소녀 같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할머니 같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나이를 알 수 없는 아이 같기도 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그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아서, 때론 충만하고 때론 외롭고 때론 쓸쓸한 그것이 맘에 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매일 아침 모닝 페이지를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 페이지를 채우는 데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까지 걸리는 데다, 너무 세게 연필을 쥐는 습관 때문일까, 무엇보다 손가락이 너무 아팠다. 쓸 말이 하나도 없는데 오늘은 또 무얼 써야 한단 말인가,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하얀 종이가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모닝 페이지를 거르는 날이 많아지자 안 되겠다 싶어 고안한 것이 ‘아침일기’다. 아침일기란 한 시간 알람을 맞춘 뒤,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꼼짝하지 않고 그 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무작위로 써 내려가는 방식이다. 쓰기도 공책 대신 비공개 개인 블로그에 입력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손 글씨 쓰는 맛은 느낄 수 없지만 손 글씨보다 빠른 입력 방식 덕분에, 시간은 줄이면서 생각의 깊이는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모닝 페이지 대신 아침일기로 바꾸면서 규칙도 하나 만들었다. ‘마지막 문장은 질문 형식으로 맺을 것.’ 두서없는 생각을 따라 타이핑을 하다가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면, 그 순간 떠오른 질문 하나로 마감을 한다. 그러다 보니 엔딩 질문이 하도 엉뚱해 웃을 때도 있다. 반면 몇 달이고 날 놓아주지 않는 질문도 있다. 요즘 나를 놓아주지 않는 질문은 “내가 아닌 내가 될 수 있을까”다.
우리는 저마다 카드를 가지고 있다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은 『조화로운 삶』(보리 2000)에서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바쁘고 힘들수록 떠올리게 되는 말이다. 나에게 ‘생각하는 대로’에 해당하는 인생의 지표나 목표는 뚜렷하게 정해진 무언가가 아니다. 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알고 싶은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는 것이다. 십 년 뒤 나의 질문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혹은 십 년 뒤에도 같은 질문을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선물 상자를 앞에 둔 아이처럼 설렌다. 십 년 뒤에나 풀 수 있는 선물인데도 말이다.
안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고 육체적으로 힘든데, 아침일기가 무어냐, 싶을 때도 있다. 이 아침 한 시간을 잠자는 데 쓴다면, 다른 창조적인 일을 한다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내 자신에게, 너는 너무 규칙적이고 절차를 중요시한다며 핀잔을 줄 때도 있다. 그러나 아침일기를 못 쓴 날이 일주일, 심지어 몇 주 동안이나 이어지면, 어김없이 회의와 무력감이 나를 채우고, 에너지는 소진되어 나는 방전되고 만다. 그러니 어쩌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영혼 카드가 있고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것을.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는 멋진 2번 카드가 있는가 하면, 매일 새벽 미사를 올리는 수녀처럼 절차와 의례가 필요한 5번 카드도 있다. 아침일기의 의례가 있어야 나는 충전되는 것이다.
*붙임: 마더피스 카드는 타로 카드의 한 종류다. ‘타로(tarot)’라는 단어의 여러 어원 중 하나는 고대 페르시아어의 ‘타리스크(tarisk)’에서 파생한 고대 이집트어인 ‘타루트(tarut)’로, ‘질문을 당한 자’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