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인문학

새로운 세상의 힘

새로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첫’ 경험의 설렘을 전해준다. 그리고 그 가슴 뛰는 설렘은 곧 다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소중한 에너지가 된다. 그것이 바로 여행의 힘이다.
에너지 인문학 | 글 나윤정 <더뮤지컬> 편집장, 공연 칼럼니스트 일러스트 이은주

매년 새해가 되면, 다이어리의 마지막 장에 올해 이루고 싶은 소망을 적어 넣는다. 그때마다 가고 싶은 여행지도 빼놓지 않는데, 그 목록에 몇 년째 더블린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럽의 아름다운 섬나라!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말이다. 사실 이유는 단순했다. 좋아하는 영화의 배경지이기 때문이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영화감독 존 카니는 <원스>, <비긴 어게인>, <싱 스트리트>로 이어지는 음악 영화를 차례로 발표하며, 자신만의 특별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그중 <원스>와 <싱 스트리트>가 바로 더블린에서 촬영되며, 전 세계 영화 팬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이소라, 윤도현, 유희열의 버스킹 체험기를 그린 JTBC의 예능 프로그램 <비긴 어게인>도 더블린을 찾아 낭만적인 음악의 도시를 고스란히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것이 더블린을 향한 동경에 힘을 보탰다.
새로운 세상으로 향한다는 것. 지친 일상에 이보다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 있을까? “여행과 장소의 변화는 우리 마음에 활력을 선사한다”고 세네카가 말했듯, 마음속에 품고 있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에게 에너지를 주는 설레는 순간이다. 처음 보는 거리, 처음 만나는 사람들, 처음 느끼는 공기…. 여행은 매 순간 ‘처음’이라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기에, 내 안의 모든 감각을 두드리고 활짝 깨워준다.

활기찬 음악의 도시

드디어, 직접 마주하게 된 더블린은 생각보다 꽤 작은 도시였다. 템플바, 그래프튼 스트리트, 하페니 다리, 트리니티 대학 등 더블린의 명소들은 걸어가다 보면 하나둘 다 만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더 정감 가고 친근한 도시랄까. 템플바 거리로 나서면 전통 아이리시 펍 20여 개가 즐비해 있는데, 예술의 도시답게 곳곳에서 음악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빨간색 간판이 인상적인 템플바는 이 거리의 상징이기도 하다.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아이리시 음악의 흥겨운 리듬과 이국적인 정취에 흠뻑 빠지다 보면, 더블린의 매력을 한층 가까이 느낄 수가 있다.
더블린을 천천히 걷다 보면, 왜 존 카니 감독의 영화 <원스>와 <싱 스트리트>가 탄생할 수 있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도시 자체가 바로 음악이기 때문이다. 낮에는 어딜 가든 버스커들이 출몰하고, 밤에는 펍 곳곳에서 라이브 연주가 이어져 음악을 일상처럼 즐길 수 있었다. 특히 그래프튼 스트리트는 버스커들의 성지라고 불릴 만큼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버스커를 만날 수 있다. <원스>의 첫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의 노래에 여자 주인공이 걸음을 멈춰 섰던 곳이 바로 이 그래프튼 스트리트다. 그야말로 음악 하나로 소중한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특별한 거리다.
또 하나, 더블린이 신기했던 것은 시내 한복판에서 정말 많은 갈매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알람을 맞춰두지 않아도, 늘 아침이면 갈매기 울음소리에 눈을 뜰 정도였다. 물론 그 이유는 더블린이 바다와 정말 가까이 있기 때문이었다. 더블린의 명물인 초록색 전철 다트를 타고 20분만 달려가면, 넓은 바다가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다트를 타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은 바로 달키 역. 역에서 내려 아래쪽 바다로 내려가면 <싱 스트리트>의 엔딩 장면에 등장했던 콜리모어 항구가, 위쪽 산으로 올라가면 <원스>의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밀리유 떼베(Miluju tebe/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체코어로 고백했던 킬리니 힐을 만날 수 있다. 어느 방향을 선택해도 영화 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으니, 나에게는 잊지 못할 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쉼과 포용의 도시

여행이 주는 에너지는 지금이나 과거에나 변함없는 듯하다. <데미안> 등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킨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도 여행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1911년 서른네 살의 헤르만 헤세는 아주 긴 여행길을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던 인도를 향해 길을 나선 것이다. 그렇게 인도에서 시간을 보낸 그는 오랜 여행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한 섬에 도착하게 된다. 그의 눈앞에는 동양의 옛날이야기 속 인물들이 하나둘 살아나 휘황한 조명 아래 배회하고 있었다. 헤르만 헤세에게 쉼을 주었던 곳. 그곳은 바로 동양의 진주라 불리는 ‘페낭’이었다.
말레이반도의 북서쪽 해안에 있는 페낭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 울릉도 크기의 섬이다. 페낭은 200여 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던 까닭에 곳곳에서 영국의 색채를 느낄 수 있다. 또 18세기 말부터는 영국의 극동 무역항으로 부상하며 동서교역의 중심지로서 큰 활약을 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일본 등에서 온 교역상들로 인해 과거 페낭은 활기를 띠었고, 그 덕분에 동서양의 특별한 조화가 페낭 문화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지타운에 들어서면, 페낭 특유의 이국적인 정취와 예술적인 감성을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다. 페낭의 수도 조지타운의 명소는 페낭항이 몰락하며 버려진 건물들에 하나둘 벽화 40여 개가 그려지며 탄생한 아트스트리트다. 만두를 파는 상인, 짐을 나르는 노인, 귀여운 고양이 등 조지타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 골목골목을 돌며 숨겨진 벽화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중 인기작은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다. 자전거가 세워진 한 외벽에 어린 남매의 신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이 금방이라도 벽화 속에서 튀어나와 자전거로 조지타운을 한 바퀴 돌 것만 같다. 벽화의 생생함 덕분에, 자전거 뒷좌석에 앉아 인증샷을 찍으려는 인파가 붐빈다. 인증샷을 찍으며 벽화와 한 풍경이 된 사람들의 표정에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조지타운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이 벽화 거리가 만들어진 데는 말레이시아 특유의 포용력이 한몫했다는 사실이다. 과거 페낭은 정부의 허가 없이 거리에 벽화를 그리는 거리예술가들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벌금을 매기거나 감옥에 가두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페낭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이 벽화들을 보기 위해 관광객이 늘어난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발상의 전환을 이루었다. 거리예술가들에게 마음껏 벽화를 그리라고 허락했고, 세계 거리예술가들도 불러 모아 벽화 거리를 만들어버린 것. 앞서 소개한 ‘자전거를 탄 아이들’은 리투아니아 작가 어니스트 자카르빅의 작품이란다.
조지타운은 과거 식민지 시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에 콜로니얼 양식의 영국적 색채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트라이쇼라 불리는 자전거 인력거를 타고 조지타운을 돌면, 마치 20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 듯한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조지타운의 다양한 건축물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온통 파란색으로 무장한 블루맨션이다. 1897년부터 1904년 사이에 건축되었다는 블루맨션은 동남아 최대 부호 청팟지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많은 집 중 하나다. 이 가문에서 가장 아꼈던 집이 바로 이 블루맨션으로, 여덟 자녀가 이곳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눈부시게 파란 이 건물은 그 아름다움 덕분에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지금은 호텔로 이용되고 있는데, 방문객들은 지정된 시간에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페낭 거리 곳곳을 걷다 보면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기독교의 성전들이 조화롭게 거리에 늘어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문화,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것이 페낭의 매력이다. 물론 헤르만 헤세 역시 이미 100여 년 전부터 이러한 페낭의 매력을 느끼며, 마음의 휴식을 얻었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 헤르만 헤세는 그 소중한 경험을 간직하며, 오랫동안 여행의 매력을 곱씹었으리라. 그 때문에 오래전 그가 남긴 말 한마디는 지금도 많은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새로운 세상으로 떠날 준비가 되었다면, 더는 망설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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