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는 생각, 이건 진리에 가깝다. 정말 맛있어서인지, 아니면 길들여져서인지 모르겠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사는 데 필요한 에너지이기 때문이 아닐까? 에너지 인문학 | 글 박사 칼럼니스트 그림 이은주
어머니는 자신의 요리 솜씨에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것은 독학자의 자부심이었다. 월북한 아버지와 재가한 어머니. 어렸을 때 부모와 떨어져 부유하지만 호의적이지 않은 친척들 사이에서 자라난 어머니는 제대로 요리를 배울 틈이 없었다. 조촐한 신혼살림을 냈을 때 일용할 매 끼니의 식사를 차려내는 것이 당시 어머니의 큰 고민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행히 어머니는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었다. 그보다 더 다행스럽게도, 어머니는 요리 솜씨 좋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음식을 먹고 자랐다. 맛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맛을 낼 줄 안다. 어머니의 평생 철학이었다.
어머니가 신혼살림을 차린 곳에서는 금천교시장과 통인시장이 가까웠다. 지금은 관광객들을 상대하느라 바쁜 술집으로 가득 찬 그 시장에서 옛날에는 하루 끼니 반찬거리를 팔았다. 어느 날은 호박 하나를 들고, 어느 날은 오이 하나를 들고, 어떤 날은 가지 하나를 들고 어머니는 물었다. “이건 어떻게 해 먹어요?” 가게 아주머니들이 한소끔, 송송, 주물주물, 파르르 등의 단어를 넣어 간단하게 조리법을 설명해주면 그날 저녁에는 그 반찬이 식탁에 올랐다. 그렇게 어머니는 자신의 레시피를 채워나갔다.
어머니는 자신이 처음으로 김치를 담갔던 날의 감격을 즐겨 얘기하곤 했다. 배추를 소금에 절여 양념에 버무려 작은 독에 담으면서도 어머니는 그 채소 더미가 김치가 될 수 있을지 의심했다고 한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어머니는 며칠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뚜껑을 열었을 때 어머니는 김치 냄새에 감격했다. 채소 더미가 김치가 되는 마술. 어머니는 평생 요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사랑을 담은 어머니의 밥상
그렇지만 어머니는 가정적인 주부가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요리는 이벤트였다. 우리 집 살림을 돌보는 사람은 일하는 언니였다. 어머니는 미술학원 원장 역할에 충실하느라 집에 얼굴을 비치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의 미술학원에 들렀고, 시켜 주는 짜장면을 먹거나 용돈을 받아 근처 떡볶이집을 들락거렸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틈이 있으면 요리를 해서 먹여주고 싶어 했고, 어쩌다 어머니의 밥상 앞에 앉으면 “맛있지? 맛있지?” 하며 찬사를 강요했다. 내게 어머니의 음식은 ‘맛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맛있기도 했지만 그렇게 믿도록 강요된 측면도 없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떠랴. 신김치를 송송 썰어 넣어 국물이 진득하도록 끓여낸 김치찌개나 가지런히 지진 두부 반찬 앞에 앉아서 우리는 화기애애했다. 음식이 가지는 인력을 나는 믿는다. 서로 사랑할 때 더 강력해지는 인력을 나는 그때 이미 깨달았다.
가운데 마당이 있는 한옥. 낮은 부엌은 툇마루를 내려가 신발을 신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여자들이 지지고 볶으며 만든 음식은 부엌과 방 사이에 있는 작은 미닫이창을 통해 드나들었다. 어린 우리 자매는 창 앞에 앉아 있다가 넘겨주는 반찬을 받아 부지런히 상으로 날랐다. 그렇게 한 상이 차려지면 그다음에는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지금의 편리함에 비추어보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석유풍로가 놓인 재래식 부엌에서도 마술처럼 음식이 만들어진다. 처음 라면 끓이는 법을 배울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이 석유풍로에 불붙이는 것이었음을 기억한다. 라면 끓이는 법을 익히자 어머니는 우리 자매에게 음식을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바빴고 우리는 어렸다. 더구나 칼과 불을 쓰는 일을 시킬 만하다 싶었을 즈음엔 어머니 곁을 떠나게 되었다. 어머니의 밥상에 대한 기억만 가지고, 나는 조촐한 짐을 싸서 이혼한 아버지와 새엄마 집으로 건너갔다. 그곳에도 밥상이 있었지만 그건 어머니의 밥상은 아니었다. 낯선 조리법과 낯선 맛. 낯선 사람들과 낯선 집. 낯선 동생과 낯선 시간. 낯선 것이 잔뜩 생기면서 익숙했던 세계는 사라졌다. 나는 우선 먹는 것부터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의 맛은 그 자체로도 고유한 맛이지만, 그보다 더 내게 에너지가 되는 것은 어머니가 건네는 살가운 말임을. 반찬 하나하나를 만들 때 나를 떠올리고, 내가 어떻게 이것을
먹으며 기뻐할지 상상하며 만들었음을 거듭 강조하는 목소리가 얹어질 때 음식은 비로소 생기를 띤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밥상
그렇지만 여전히 음식은 우리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어쩌다 어머니의 집에 가면 어머니는 무슨 음식을 해줄까부터 궁리했다. “너 두부 부친 거 좋아하잖아.” 이미 성인이 되어 입맛이 변한 뒤에도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음식을 기억하고 예전과 똑같은 맛으로 만들어냈다. 어렸을 때 놓아 보낸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헤어지기 전에 해주었던 음식뿐이었다.
어쩌다 전화 통화를 하면 무엇을 먹고 지내는지 궁금해했고, 간단한 볶음밥 같은 요리법을 말해주었다. 실패한 요리에 대해 말하면 왜 실패했는지, 다시 맛을 살려낼 방법은 무엇인지 일러주었다. 그렇게 배운 것은 변변찮았지만 소중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리와는 무관한 사람이 되어갔다. 어머니가 적대적인 친척들 사이에서 얌전히 수저만 놀렸듯이, 나도 굳이 요리를 배울 필요 없이 주는 밥을 먹으며 자라났다.
내가 어머니와 같이 오래오래 살았더라면 중학교 때는 중학생이 할 만한 요리를, 고등학교 때는 고등학생이 만들어낼 만한 요리를 배울 수 있었을까. 성인이 되었을 때는 제법 한 상 차려내어 사람들을 대접할 만한 내공을 갖게 되었을까. 어머니처럼 바쁜 시장통 아주머니들에게 묻고 적어가며 배우지 않고도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나도 내 어머니의 맛을 얼추 재현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인생에 만약이란 없다. 어머니는 요리를 좋아하고 나는 요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 이제껏 함께 살았더라도 나는 내 허기 채울 간단한 음식 말고는 도무지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리라. 지금처럼.
밥상 앞에서 오가는 살가운 말이 바로 에너지
어느 날, 이미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차려주셨던 밥상을 기억한다. 개다리소반만큼 작은 밥상 위에 간장종지만 한 그릇에 반찬을 오종종하게 담은 어머니는 “상다리 부러지겠지?” 하며 웃었다. 마치 소꿉놀이 같은 밥상을 앞에 놓고 어머니와 나는 시장통 아주머니들처럼 무릎을 세우고 앉아 밥을 먹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랬듯이 어머니는 이 반찬은 어떻게 만든 것인지, 이것을 먹어본 누구는 어떤 칭찬을 했는지, 이 재료는 원래 이런 걸 만드는 건데 이렇게 해보니 어떻게 색다른지 말하고 또 말했다. 나는 어머니가 젓가락으로 짚어주는 순서대로 밥을 먹었다. 감탄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맛을 음미하고, 부족한 반찬을 더 담아 오며. 한옥 방바닥에 넓게 펼쳐진 상에 둘러앉아 할아버지가 수저를 들어 간장에 한 번 적셔 입에 무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수저를 들던 그날처럼 먹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어머니의 맛은 그 자체로도 고유한 맛이지만, 그보다 더 내게 에너지가 되는 것은 어머니가 건네는 살가운 말임을. 반찬 하나하나를 만들 때 나를 떠올리고, 내가 어떻게 이것을 먹으며 기뻐할지 상상하며 만들었음을 거듭 강조하는 목소리가 얹어질 때 음식은 비로소 생기를 띤다. 음식은 단지 몸을 움직일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천진한 사랑을 받았던 적이 있었음을 몸으로 기억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음식 맛이 변하는 순간은 온다. 맛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맛을 낼 줄 안다는 어머니의 철학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어머니가 맛에 둔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어머니의 음식 맛은 널을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떤가. 오래 보지 못한 딸의 얼굴을 보자마자 뭐 먹고 싶은 것 없냐고 묻는 어머니의 마음이 있는데. 찌개가 짜면 조금 덜 뜨고, 반찬이 달면 조금 덜 먹으면 되지. 그렇게 음식에 담긴 마음만 빨대로 빨듯 쪽쪽 빨아먹는다. 배 속 아래부터 에너지를 차곡차곡 쌓으며, 그렇게 한 끼 식사를 먹고 등을 높게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