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위대한 사상가 구르지예프가 청년시절 알렉산드로폴에서 경험한 일이다. 땅바닥에 작은 원이 하나 그려져 있고 그 원안에서 소년 한 명이 이상한 몸짓을 하고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원 안에 있는 소년은 야지디(Yazidi) 교도인데, 누군가 그 아이의 주위에 원을 그렸고, 원을 지우지 않는 한 소년은 원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소년은 원 밖으로 나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장정 두서너 명이 소년을 끌어내려 아무리 애써도, 그들이 가진 힘보다 더 강력한 어떤 주문이 그를 원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알고 보니, 야지디 사람들은 원을 그려놓으면 그 안에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기업문화 오디세이 | 글 신상원 기업문화 테라피스트,
『기업문화 오디세이』 저자, 신과기업SHIN&company 대표
이‘주문 걸린 원’이란 무엇일까? 구르지예프는 관습과 문화라고 했다. 우리 인간, 호모 사피엔스는 문화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 거꾸로 문화는 그 집단의 존속을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한다. 그래야 구성원을 소속시키고 그 집단만의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라고 예외일까? 그럴 리 없다. 모든 인간 집단은 문화를 가진다. 그리고 기업이야말로, 현대의 가장 강한, 고유한 경계를 가진 집단이다. 기업문화는 ‘보이지 않는 주문’으로 그 집단의 모든 소속원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이 주문은 바로 ‘암묵적 소명’이다. 인류학과 신화학을 기반으로 기업의 고유한 문화를 탐구하는 일을 하고 있는 필자는, 이 ‘주문 걸린 원’이 수년,수십 년, 때로는 무려 700년 넘게 영향을 미치고 있던 적잖은 사례를 보아왔다.
‘주문 걸린 원’은 ‘걸어놓은 주문’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화장품 기업이 있었다. 해외 법인과 공장도 오래전부터 설립하고, 시스템 선진화, HR 선진화, 글로벌 비전 선포를 통해 본격적으로 글로벌 사업을 가속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변화에 저항하고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심지어 글로벌 사업과 혁신 추진 부서는 ‘왕따’가 되기도 했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이 회사는 창업 이후 수십 년 동안 국내 시장에서 일인자였다. 무수한 해외 브랜드가국내 시장에 들어와도 이를 물리치고 1위 자리를 계속 지켜왔다. 그러면서 가지게 된, ‘해외의 침략자들로부터 우리 시장을 지킨다’라는 암묵적 소명, 이것이 그 회사 기업문화의 핵이었으며, 그들이 걸어놓은 ‘주문’이었고 ‘주문 걸린 원’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이미 무수한 글로벌 기업을 물리친, 그러므로 ‘이미 세계 1위가 된’ 상상의 원 안쪽이 안전했기에.
100년도 더 된 먼 옛날, 조선말기의 한 국가기관에서 기원한 어느 기호식품 회사는, 국가를위해 헌신한 ‘유공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정부기관에서 공사로, 공기업으로, 민간기업으로 되기까지의 백여 년 동안 이러한 정체성은 변하지 않았고 강한 자부심을 형성해왔다. 그러나 이면에는 ‘숨은 문화’가 있었다. 바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다’라는 암묵적 소명이었다. 국가의 세수 확보를 위해 희생해왔으나, 국가는 건강에 유해한 식품으로 지정하고, 오히려 터부시하고 고개를 돌렸다는 ‘집단적 무의식’이 당시의 기업문화를 지배하고 있었고, 새로운 사업 기회 모색과 확장을 가로막고 있었다.
무려 700년이 넘게 지속되던 ‘주문’도 있었다. 프랑스의 기업문화 전문 컨설팅 기업인 ACG와 함께 프랑스 ONF(Office National des Forest, 산림청에 해당하는 공기업)의 사례를 탐구하던 때의 일이다. 주된 탐구 질문은, 숲과 삼림을 담당하는 그 기업의 ‘숨은 정체성은 무엇인가’였다. 에코 투어리즘 사업을 위한 숲 개방, 목재 수출량 증가를 위한 친환경적 벌목 사업 등이 번번이 실패로 끝났는데, 바로 직원들의 알 수 없는 저항 때문이었다. ‘주문 걸린 원’의 기원은 무려 13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갔다. 절대 왕정을 구축하려고 했던 필립 4세는 교황의 권위에 대항할 만한 강한 상징적 조처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왕국의 울창한 삼림을 ‘왕의 에덴동산’으로 조성했다. 그리고 그 숲을 관리할 ‘숲의 천사단’을 만들게 되는데, 이 회사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신성한 숲을 지켜라! 숲을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하라! 700년이 넘게 숨겨져 내려온 소명은 고객들의 숲 여행도, 목재 벌목도 모두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기업문화 전체에만 ‘주문의 원’이 통하는 걸까? 그럴 리 없다. ‘정보를 공유해서는 안 된다’, ‘나서지 말라’, ‘먼저 행동하면 안 된다’, ‘성과는 적당히’, ‘비판을 삼가라’ 등 사업부, 부서 단위의 모든 암묵적 금기들은 조직문화를 만든다. 우리는 그 원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한다.
혁신과 변화는 주문을 깨는 것에서 시작
이쯤 되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구르지예프는 어떻게 했을까? 사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원의 한쪽을 살짝 발로 지우는 수밖에 없었다. 원을 다 지우는 건, 곧 소년의 설 자리 자체를 없애는 일이었기에. 또 원 밖으로 나오는 건 오직 소년 스스로 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에. 작은 틈이 생기자 소년은 비로소 원이 있음을 바라볼 수 있었고, 한참 후에 용기를 내어 스스로 걸음을 뗐다. 소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필자의 이야기, 그리고 여러분의 이야기는 그 뒤를 잇는다. 야지디 소년은, 화장품 기업은, 기호식품 기업은, 숲의 천사단은, 원에서 나와 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새로운, 더 크고 적합한 원을 그렸다. 새로운 혁신과 도약에 성공한 것이다.
90년대까지 국내 최고의 화장품 기업에서 이제는 아시아 뷰티를 전파하는 소명을 가진 글로벌 기업으로, 오랜 역사 속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해오던 기호식품 회사는 전통 식물이가진 가치로 더 나은 삶의 가치를 완성하는 소명을 가진 그룹사로, 프랑스의 ‘숲의 천사단’은 ‘숲의 가치를 인간에게 돌려주는’ 기업으로 혁신했다. ‘더 가치 있고 큰 원’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부의 수많은 ‘작은 원’에서 나와서 다시 그리는 작업을 스스로 진행했다. 그 시작은, 원의 작은 틈을 지우고, 내가 서 있던 원에서 떨어져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했다. 혁신과 변화는 언제나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에서 촉발된다. 그리고 근본적 변화는 보이지 않던 암묵적 소명이라는 주문을 깨는 것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오랜 참여 관찰과 인터뷰를 전제로 하는 문화인류학 방법론을 기초로 하는 필자로서는남부발전에 어떤 분석과 의견을 제시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남부발전은 ‘주문을 깨고 새로운 원을 그린’ 놀라운 혁신의 시기를 거쳐왔음은 분명해 보였다. 기업의 인류학 탐구자로서 다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여러분도 구르지예프가 되어 답해보기를 부탁한다.
남부발전의 ‘주문 걸린 원’은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그 원에서 나오게 되었나? 새롭게 그린 원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무엇보다, 여러분은 언제나 ‘주문을 깰’ 용기와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