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up

경계를 허문 예술가 – 앤디 워홀 Andy Warhol

1962년 로스앤젤레스 페러스 갤러리엔 32개의 ‘캠벨수프’ 깡통 그림이 전시됐다. 1964년 일레노 와드의 스테이블 갤러리엔 ‘브릴로 비누’ 상자 등 400개의 잡화점 상자가 전시됐다. 고고한 예술 작품을 전시하던 갤러리에 격식, 상식이란 프레임을 깨고 당시 산업화, 대량생산의 대표 산물이었던 캠벨수프 캔, 잡화점의 상자들을 소재로 한 파격적인 작품을 전시한 작가, 오늘날 ‘팝아트의 대가’, ‘팝아트의 거장’이라 불리는 앤디 워홀이다. 커리어 up | 글 박근희 조선일보 프라이데이 섹션 기자

‘20세기 최고 미술 흥행사를 기록한 상업예술가’.
앤디 워홀을 두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정확히 표현하자면 앤디 워홀은 순수예술가이자 상업예술가였으며, 감히 그 누구도 허물지 못했던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높은 경계를 허문 예술가였다.

앤디 워홀은 1928년 8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시의 방 두 개짜리 연립주택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이민자인 건설노동자 아버지, 가사도우미 어머니 사이에서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한, 시쳇말로 ‘흙수저’였지만,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가족들 덕분에 그는 회화와 디자인으로 유명한 카네기 공과대학(지금의 카네기 멜론 대학교)에 진학해 시각디자인을 전공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워홀은 뉴욕으로 이주해 자신의 꿈과 관련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이후 「댄스 매거진」 표지, 유명 백화점과 ‘타이버 프레스 레코드’ 회사를 위한 드로잉과 그림 등을 비롯해 유명 잡지 「보그」, 「하퍼스 바자」 등에 삽화를 그렸으며 ‘티파니’사와도 일하며 상업적 아티스트로서 자신만의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1952년엔 뉴욕의 휴고 화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트루먼 커포티’를 주제로 한, 첫 번째 전시를 열어 대성공을 거둔다. 전시회 오프닝에 초대했던 커포티는 끝내 오지 않았지만 그는 이 전시로 상업미술 분야에서 위상을 한층 높였고, 자신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이밀러사’의 구두 드로잉 광고도 맡게 됐다. 이 광고가 「뉴욕타임스」에 실리면서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이 광고 디자인으로 상업미술가 클럽에서 주는 상을 받았고 이듬해 아트 디렉터 클럽으로부터 메달도 수상했다. 한 해 총수입만 10만 달러를 넘었다.

팝아트의 새로운 장을 열다

그가 1950년대를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로 등극한 계기는 500만 명의 독자가 구독하는 「라이프」지에 그의 드로잉 작품이 실리면서다. 상업미술로 성공했지만 순수미술에 열망을 갖고 있던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회화에도 집중한다.
그는 1962년 이전에 그린 회화와 전혀 다른 ‘캠벨수프 캔’ 시리즈를 세상에 선보였다. 1960년대는 미국에서도 산업화가 극에 달했던 시기. 앤디 워홀은 기술 발달에 의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착안해 캠벨수프 캔, 코카콜라 등 당시 대량생산의 산물이었던 현실적인 소재를 선택, 이것을 다시 실크스크린이라는 대량생산 기법으로 찍어냄으로써 팝아트에 새로운 장(場)을 열었다. 작품을 대량생산하는 것을 두고 당시 순수예술가들은 그를 ‘상업주의 예술가’라고 경멸하기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평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갔다.
그가 남긴 수많은 명언엔 자신의 작품과 삶에 대한 당당함이 묻어난다. 코카콜라 작품에 대해 그는 “텔레비전 광고에 등장하는 코카콜라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미국 대통령도 마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카콜라는 그저 콜라일 뿐, 아무리 큰돈을 준다 하더라도 길모퉁이에서 건달이 마시고 있는 콜라보다 더 좋은 콜라를 살 수는 없다. 유통되는 콜라는 모두 똑같다”라고 말했다. 즉, 그는 일상적인 소재들을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냄으로써 예술을 일반 대중의 삶 속으로 끌어들였다. 예술이 특별한 사람들만 누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깨뜨린 것이야말로 앤디 워홀이 남긴 최고의 업적이다.
그는 팝아트의 거장으로서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다시 1964년 모자 공장을 개조해 ‘팩토리’란 이름의 작업 스튜디오를 열어 혼자 작업하는 다른 예술가들과 완전히 차별화된 세계를 구축해갔다. 팩토리란 이름처럼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듯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후 몇 번 팩토리를 옮겼지만, 옮길 때마다 앤디 워홀의 팩토리는 당대 최고의 스타부터 시인, 화가, 부유층, 미소년, 마약중독자, 성전환자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그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성과 융합의 맛을 알게 됐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을 관찰해 작품에 반영,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잠’, ‘엠파이어’ 등 독립영화도 여러 편 찍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69년 「인터뷰(interview)」란 잡지를 발행하며 예술, 패션, 상류사회, 영화, 모델 등 다양한 예술 세계를 아우르는 기록물을 남기기 시작했다.
1987년 2월 뉴욕 맨해튼에서 담낭 수술과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영원히 은퇴하지 않을 것처럼 상업광고 작업을 하고 TV쇼와 뮤직비디오, 패션쇼 등에 관여했으며 대형 자화상 시리즈를 선보였다. 오늘날 그가 예술계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연구 대상이 되는 것도 발상의 전환을 통해 끊임없이 콘텐츠를 생산하고 쉴 새 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에게 배우는 커리어 팁 1

워홀은 순수미술 작업을 하면서 미학적 측면보다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그는 동시대의 여느 화가들과 차별되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화랑을 자주 방문해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보고 부지런히 배워 그것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그림들을 그려냈다. 여느 상업미술가처럼 작업실에 틀어박혀 의뢰받은 일만 했다면 오늘날의 앤디 워홀은 없었을 것.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고 그러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나 자신을 차근차근 알렸다. 자신이 나가고 싶은 분야에 속한 사람들, 자신의 작품에 관심 갖는 사람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투자’였다.

앤디 워홀에게 배우는 커리어 팁 2

워홀은 많은 사람을 만나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수용했다. 때로 그것이 충고와 비난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을 발전시켰다. 자신과 가까이에서 자신의 그림에 아낌없이 충고하고 평했던 에밀리 안토니오(워홀은 그를 ‘디’라고 불렀다)가 “개똥 같은 그림”이라고 극단적 표현을 해도 그는 그의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들였다. 『파피즘: 워홀의 60년대』란 자서전에서 워홀은 디에 대해 “나는 디의 말을 듣기를 좋아했는데, 그는 말을 잘했고 깊이 있는 말을 했으며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료하게 말했다”고 밝힌 바 있다. 디가 칭찬한 흑백의 코카콜라 병 그림은 오늘날 팝아트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그림이 됐다.

앤디 워홀에게 배우는 커리어 팁 3

미국 화가 로버트 라우션버그는 “워홀은 예술사학자들에게 아주 골칫거리다. 워홀이 일부러 예술사를 무시하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그가 폭발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워홀은 예술 인생에 걸쳐 끊임없이 평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에 동요하지 않았다. 논란에 중심에 서 있던 ‘초상화 시리즈’를 그릴 땐 “예술이라고 포장해 돈을 번다”는 비난을 들었지만 그는 초상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초기에는 당대 유명인들을 직접 찾아가 의뢰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사실 당시는 팝아트의 시대는 끝났고, 앤디 워홀은 새로운 방법이나 돌파구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앤디 워홀은 자신이 처한 이런 현실을 초상화 시리즈로 극복했고, 결론적으로 이때 그린 초상화 시리즈는 앤디 워홀의 특허품이 됐다. 오늘날, 평범한 집에서도 메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의 초상화를 걸어둘 수 있는 것도 앤디 워홀이 스스로 개척한 지속 가능한 작업 환경 덕분이 아니었을까.

Show More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