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여행

영국 신사를 만나러 가는 길

영국 런던과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19세기 영국은 ‘대영제국’이란 이름으로 번영을 자랑했다. 산업혁명과 식민지 지배로 유례 없는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템스 강변을 따라 런던 여기저기에 으리으리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 사이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온다. 산책하듯 느린 걸음이지만 눈빛만은 날카롭게 빛난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남자의 이름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 글감을 찾아 런던 거리를 쏘다니는 게 그의 일과였다. 책+여행 | 글+사진 이준명 인용 『위대한 유산』(민음사, 2009)

찰스 디킨스의 흔적을 간직한 박물관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디킨스의 작품에는 19세기 영국 사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찌나 정확한지 역사학자들이 연구 자료로 삼을 정도. 이는 신문사 통신원으로 일했던 디킨스의 이력 덕분이다. 기자 특유의 관찰력과 표현력을 소설 집필에도 사용했던 것. 특히 1861년에 완성한 『위대한 유산』은 시대상에 대한 고찰에 문학적 완성도까지 높아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소설의 주인공은 핍이라는 사내아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누나 손에서 자랐다. 어느 날 탈옥한 죄수 매그위치와 마주쳤다. 매그위치의 협박에 족쇄를 자를 줄칼과 먹을거리를 가져다주었다. 다행히 매그위치가 붙잡힌 덕에 탈옥자를 도운 죄는 그냥 묻히고 말았다. 이후 핍은 매부가 운영하는 대장간에서 일을 배웠다. 매일이 고되고 지루했다. 평생 대장간 일만 하다 끝날 미래가 우울했다.
사실 19세기 영국 사회는 겉만 번지르르할 뿐 속은 곪아 있었다. 노동자들은 턱없이 낮은 임금 탓에 빈곤에 시달렸다. 그 바람에 어린아이들까지 일터로 나서야 했다. 대영제국의 번영은 서민들의 고통과 희생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디킨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하급 관리였는데도 빚에 쪼들렸다. 하는 수 없이 자녀들 중 장남인 디킨스를 구두약 공장에 취직시켰다. 겨우 12살의 어린 나이였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빚은 계속 불어나 결국 채무자 감옥에 수감되고 말았다. 디킨스는 홀로 하숙집에 머물며 일을 계속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버지를 만나러 감옥을 찾았다. 다행히 아버지의 수감 생활은 할머니의 유산 덕분에 6개월 만에 끝났다. 디킨스도 공장을 그만두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만약 할머니의 유산이 없었다면 평생 구두약 공장에서 일하다 죽었을 테다. 그야말로 영국의 문호 디킨스를 탄생시킨 ‘위대한 유산’이었다 할까.

핍과 매그위치의 첫 만남을 그린 『위대한 유산』 표지
천부적인 이야기꾼 찰스 디킨스

이름 모를 후원자의 정체

어느 날 핍에게 이름 모를 후원자가 나타났다. 핍이 신사가 될 수 있도록 경제적인 도움을 주겠단다. 핍은 기꺼이 행운을 받아들였다. 런던에 올라와 교육을 받으며 흥청망청 돈을 써댔다. 상류사회 생활에 푹 빠져 빚까지 지고 말았다. 그렇게 빈둥거리며 지내는데 매그위치가 불쑥 찾아왔다. 자신이 핍을 도와준 후원자라며. 그 옛날 탈주를 도와준 은혜를 갚고 싶었단다.
“‘하느님’, 나는 매번 말했지.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 탁 트인 하늘 아래에서 외쳤지. ‘내가 만약 자유의 몸이 되고 부자가 된다면 반드시 그 앨 신사로 만들고 말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안 하면 날 꼬꾸라지게 하소서!’ 하고 말이다. 그런데 난 정말로 그걸 해낸 것이다. 자, 네 모습을 좀 보거라, 얘야! 여기 네 이 거처를 보거라. 귀족한테도 어울릴 만한 곳이로구나! 귀족? 오, 그래! 넌 돈에 대해선 귀족과 내기를 해도 이길 수 있을 거다!”
전통적으로 영국 사회는 세습 귀족이 지배층을 형성해왔다. 하지만 19세기에 산업혁명으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이 주요 세력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신사(紳士)’란 계급적 정체성을 필요로 했던 중산층이 만들어낸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이었다. 신사가 되려면 ‘노동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이나 재산이 있는 사람으로서, 적당한 교육을 받고 세련된 교양과 예의범절을 갖추고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존경할 만한 도덕성과 인격을 지닌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매그위치는 돈만 많으면 신사가 되는 줄 알았다. 값비싼 옷차림을 하고 클럽을 들락거리기만 하면 된다고. 매그위치의 말을 들은 핍은 큰 충격에 빠졌다. 자신이 흥청망청 써온 돈이 추악한 범죄자의 것이었다니.

“‘하느님’, 나는 매번 말했지.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 탁 트인 하늘 아래에서 외쳤지. ‘내가 만약 자유의 몸이 되고 부자가 된다면 반드시 그 앨 신사로 만들고 말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안 하면 날 꼬꾸라지게 하소서!’ 하고 말이다. 그런데 난 정말로 그걸 해낸 것이다. 자, 네 모습을 좀 보거라, 얘야! 여기 네 이 거처를 보거라. 귀족한테도 어울릴 만한 곳이로구나! 귀족? 오, 그래! 넌 돈에 대해선 귀족과 내기를 해도 이길 수 있을 거다!”

템스 강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백조

템스 강과 찰스 디킨스 박물관

디킨스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다. 이런 입담은 타고난 것이지만 글감은 계속 발굴해야 한다. 그래서 디킨스는 매일같이 런던 거리를 쏘다녔다. 때로는 새벽 2시에 일어나 켄트의 개즈힐까지 50킬로미터를 걸어가 아침 식사를 했단다. 런던 최고의 산책로는 템스 강변이다. 강변을 따라 영국을 상징하는 건물들이 쭉 늘어서 있다. 4면에 커다란 자명종 시계가 달린 빅벤이 시선을 끈다. 옆에는 영국 의회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국회의사당이 거대한 덩치를 자랑한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다리를 들어 올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런던의 명물인 타워브리지이다. 디킨스도 템스 강변을 거닐며 소설을 구상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 이야기도 술술 풀려나왔다. 템스강이야말로 디킨스를 낳은 젖줄이었다 할까.
런던 다우티 스트리트 48번지에는 ‘찰스 디킨스 박물관’이 남아 있다. 디킨스가 작가 생활 초기인 1837년 가족을 데리고 2년 동안 머문 집이다. 이 집에서 메리와 케이티 두 딸도 얻었다. 디킨스는 전부 열 명의 자식을 둘 정도로 가정을 중시한 작가였다. 가정 관련 잡지를 두 개나 발행할 정도로 가정의 화목함을 강조했다. 그런데 아내 캐서린과 성격 차이로 반목하다가 1858년 별거에 들어가고 말았다. 디킨스는 산업화로 메말라가는 영국 사회를 구원할 희망을 가정에서 찾으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가정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으니 아이러니하다. 다락방까지 총 4층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은 조지 왕조풍으로 지어진 옛 건물이다. 디킨스는 이 집에서 『올리버 트위스트』를 탈고해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작가로서의 성공에 가정의 화목함까지 더해진 행복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런던의 상징과도 같은 시계탑 빅벤
템스 강의 명물 타워브리지의 야경

진정한 신사의 자격

핍은 매그위치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런던에서 벌여온 신사 행세는 범죄수익금으로 지탱해온 꼭두각시놀음인 셈이었다. 하지만 핍을 향한 매그위치의 애정은 진심이었다. 핍이 어엿한 신사로 자라길 바라며 죽을힘을 다해 돈을 모았다. 게다가 매그위치는 붙잡히면 사형당할 걸 알면서도 핍을 보러 런던까지 왔다. 핍은 매그위치를 살리기 위해 탈출을 계획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감옥에 갇힌 매그위치는 사형당할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핍은 매그위치를 저버리지 않았다. 매일 감옥을 찾아가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왔다. 마치 디킨스가 어릴 때 아버지를 만나러 감옥을 찾았던 것처럼.
핍은 매그위치의 후원이 끊어지자 신사의 품위를 지킬 수 없었다. 더는 비싼 옷을 입을 수도, 클럽을 들락거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불쌍한 사람을 동정할 줄 알았다. 타인을 포용하는 성숙한 자세도 갖추었다. 디킨스는 돈보다 ‘존경할 만한 도덕성과 인격’이 진정한 신사의 자격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영국에 갈 때마다 생각한다. 디킨스가 말한 진짜 신사와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템스 강변을 함께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면 얼마나 즐거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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