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인문학

아름다운 강화도

에너지를 샘솟게 하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고향처럼 정 붙이고 사는 곳을 흔히들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서울서 나고 자란 나에겐 이곳 강화도가 바로 제2의 고향이다. 부모님을 떠나 신혼살림을 차린 곳도 강화도요, 삼 남매를 낳아 지금까지 20년을 넘겨 살고 있는 곳도 강화도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인문학 | 글 이우영 만화가 일러스트 이은주

내가 강화도에 살게 된 건?

내가 강화도에 정착하기 전 강화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학교다닐 때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게 다였고, 여행 한번 와볼 기회도 없었는데 내가 강화도에서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따지고보면 강화도행은 자의로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아내가 결혼 전부터 강화도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었고 결혼 후에도 계속 일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프리랜서인 내가 부모님 말씀처럼 ‘마누라 따라 시집온 꼴’로 결정되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이곳에서 살 확률은 거의 없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정말 누구를 만나서 인연을 쌓는지에 따라 인생이 얼마나 많이 바뀌는가에 새삼 놀라게 된다.

잠깐 언급했듯이 나의 강화도행에 결정적 역할을 해준 사람은 바로 아내다. 아내와 처음 만난 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예술과가 생긴 지방의 한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였다. 지루한 진행에 졸고 있던 차, 돌연 들려오는 ‘딸들아 일어나라’라는 외침에 절로 고개가 무대로 향했다. 단상엔 웬 조그만 여자가 두 다리를 떡 벌리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육성으로 여자 신입생들을 향해 여자로서 자부심을 갖자고 외쳐대고 있었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목청 좋구나, 기가 엄청 세게 생겼네, 저 여자랑 결혼하는 남자는 무지 피곤하겠어’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는데 그 피곤한 남자가 내가 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남자가 없던 학교에 만화 그리는 남자애들이 들어오니 이곳저곳에서 일 시키느라 많이도 불러댔다. 심지어 춤 못 추는 나까지도 동기 둘과 ‘문선대(문화선전대)’를 하게 됐다. 그때 우리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쳐주던 무서운 선배가 바로 ‘딸들아 일어나라’를 외치던 유아교육과 2학년이었던 지금의 아내다. 지금도 가끔 회전의자에 깊숙이 앉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우리에게 춤 동작을 무한 반복시키던 집사람의 포스 넘치는 얼굴이 떠올라 웃음 짓곤 한다.

결정적 감정 표현 없이 휴학 후 입대를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잊혔는데 제대 후 2개월쯤 되었을 때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자 친구도 없이 쓸쓸히 만화 작업만 하던 차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렇게도 않던 동성동본 금혼법이 우리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부모님은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셨고 이에 맞서 사랑에 눈이 멀어 부모님께 반항하는 불효를 저지르길 몇 달 후, 짐싸서 가출을 결심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하는 찰나에 엄청난 타이밍으로 ‘동성동본 금혼법 폐지’ 뉴스가 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이쯤 되자 더는 반대를 못 하시고 허락해 주셔서 결혼까지 이르렀다. 몇 해 전 방영했던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마지막 회에 성선우(고경표 분)와 성보라(류혜영 분)도 동성동본으로 고민하다 법이 바뀌면서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거 완전 우리 얘기네’ 하며 무척이나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육아와 함께 시작된 강화도살이

아직도 ‘배 타고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실제로 있지만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강화도는 외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다. 지금이야 강화 서울 간 고속도로까지 놓인다고 할 정도로 길이 좋아져서 찾아오기 쉽지만 예전엔 주말마다 강화도를 찾았다가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길이 꽉 막혀서 옴짝달싹 못 하고 명절날 고속도로를 방불케 하기 일쑤였다. 엉덩이가 무거워 밖에 돌아다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저런 수고와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강화도를 찾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섬살이가 한참 흘렀건만 어디에 뭐가 있는지 도저히 알지 못할 정도로 강화도에 무심했었다. 그래도 모처럼 놀러온 친구들이 길 안내를 부탁하면 차마 ‘나도 너처럼 여기 지리 잘 모른단다’라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알았다고 나섰다가 같이 길을 헤매기 일쑤였다. 내비게이션이 있는 지금도
가끔 엉뚱한 길로 빠지는 길치인 나에게 애초에 그런 제안을 한 친구들이 나빴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기다리던 큰아이가 태어났다. 기쁨과 함께 큰 고민이 시작됐다. 아기를 봐야 하는데 직장인인 아내가 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멀리 계신 데다 농사일과 농장 일로 바쁘신 양가 부모님께 부탁드릴 수도 없었다. 고심 끝에 ‘내가 볼게’라고 큰소리 치고 육아를 맡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냥 분유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면 되는거 아냐’라는 단순한 마음이었다. 그다지 미덥진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던 아내도 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아내가 출근하면 아이와 나, 오롯이 둘만 남는 생활이 시작됐다.

주간만화 연재와 단행본 작업 등을 혼자 하던 나에게 그야말로 너무나도 큰 과제가 떨어진 것이다. 아이가 울면 포대기에 싸서 흔들며 윗면이 넓은 옛날 텔레비전 위에 원고지 받침대를 놓고 만화 밑그림을 그리며 힘겹게 연재를 이어나갔다. 아이가 낮잠을 잔다고 같이 쉴 수는 없었다. 그 시간이야말로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었다.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환희의 시간도 있었다. 아이가 처음 몸을 뒤집는 것도, 일어나 앉는 것도, 처음 불안하게 뒤뚱뒤뚱 걷는 모습도 모두 눈앞에서 지켜보며 아내에게 알린 것도 나였다. 출퇴근을 해야 하는 아빠들은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일 것이다. 그렇게 아이가 엄마 따라서 유치원에 갈 때까지 40개월쯤을 아이와 보내는 동안 한 번의 원고 펑크 없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살아냈다.

봄이 왔는지 겨울이 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나 내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다. 육아의 시간은 둘째, 셋째로 이어졌다. 큰아이 때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두 아이는 18개월씩만 맡고 조금 이른 시기에 어린이집에 보냈다. 나는 육아하는 엄마들의 고충을 너무나 잘 안다고 자부한다. 육아 우울증이 뭔지도 안다. 엄마들은 정말 대단하다. 아빠들도 육아의 시간을 통해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아빠와 아이들 간의 친밀감이 훨씬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강화도는 제2의 고향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이제야 강화도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꽃의 아름다움을 잘 모르던 남자도 나이 들면 꽃이 예쁜 줄 안다고 하더니 지금의 내가 그렇다. 우리 집 앞이 강화 나들길 코스였는지도 새삼 알게 됐다. 나는 요즘 짬 날 때마다 자전거를 타고 강화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작업하다 생각이 막힌다 싶으면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그리고 해안도로를 마냥 달린다. 신미양요와 병인양요의 격전지 광성보, 초지진을 지나간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의 근원지이자 산의 기가 우리나라에서 손꼽힌다는 마니산을 지난다. 멀리 갯벌이 눈에 들어온다.

‘체험한다고 갯벌을 정화해주는 고마운 칠게를 비롯한 생명들을 잡아가면 안 되는데’라고 혼자 생각한다. 외포리 선착장을 지날 때 아이들과 갈매기에게 새우과자 주던 추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는다. 강화 본섬과 석모도를 이어 주는 다리를 지나간다. 해병대 군인 아저씨들이 지키는 초소를 지난다. 고인돌 박물관을 지나가며 원시 시대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한다. 몽골에 저항하던 고려 왕조의 흔적을 지난다. 삼별초를 생각한다. 연미정 너머 손 뻗으면 닿을 듯한 북한 땅을 바라본다. 통일은 언제쯤 될 수 있을까? 상념에 젖는다. 강화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섬 일주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만은 말짱해진다. 막혔던 뭔가가 뻥 뚫린 듯한 상쾌한 마음이 든다. 진작 관심을 가져주지 못해 미안할 뿐이다.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서는 느껴보기 힘든 정서적인 포만감으로 가득 채워주는 곳! 내가 사는 이곳이 그리고 가족이 나의 마르지 않는 에너지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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